[김대국의 나의 역사, 자서전을 쓰다] 10. 쓰는 법 예시
[김대국의 나의 역사, 자서전을 쓰다] 10. 쓰는 법 예시
  • 김대국
  • 승인 2019.11.28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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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 자기에 관한 글쓰기는 자기 자랑이 아닌 성찰적 글쓰기여야 합니다.

프랑스의 사상가 몽테뉴의 마지막 역작 ‘몽테뉴 수상록’은, 자기의 체험과 독서생활을 근거로 한 자연에 몸을 맡기고 인생의 지혜로 추구했다.

“내가 그리고자 하는 것은 나의 행위가 아니라 나의 본질이다”는 보편적 인간에 이르는 노력을 보여주었다. 500년의 세월을 거슬러 오늘날까지 다른 사람에 대한 포용, 다른 것에 대한 가치, 다양함에 대한 존중 등의 사상적 영향력을 남겼다.

글쓰기가 범람하는 오늘, 우리 시대의 글쓰기가 지향해야 할 지점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용기를 내서 자신의 자서전을 직접 써보고, 글을 쓰면서 과거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는 것도 인생을 제대로 사는 법입니다.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미래의 모습을 점검하기도 합니다. 위대한 사람만 자서전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평범한 사람 모두가 유일한 존재로서의 가치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순수 개인적 기억과 역사적 연보를 연관하여 글로 남겨두는 것도 역사적 사명의 일환일 수 있습니다.

1. 나의 출생과 어린 시절(1956~1968)

나의 아버지는 경찰공무원이셨다. 근무지가 전국으로 흩어져있기에 형제들이 태어난 곳에 모두 다르다. 나는 1956년 아버지가 충주경철서장 재직 시 4남 2년 중 5번째로 태어났다. 산모가 아이를 씻겨준 사진만 있을 뿐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은 없다.

아버지는 일제 시절 양정고교와 일본 중앙대학을 다닌 것으로 보아 할아버지의 재산은 상당했고 자녀에 대한 교육열이 높았다. 1944년 한국의 전체 인구는 이천오백만 명으로 대학⚫전문대학을 나온 비율이 0.2퍼센트에 불과한 것을 보면 아버지는 분명 인텔리였다. 13세 이상 인구의 77%가 한글을 모르는 암흑의 시대였다. 어머니는 고향이 순천임에도 언니를 따라가서 부산여고를 다녔다. 아버지의 소원은 소박했다. ‘가족의 건강과 화목’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당시 중학교 시험 경쟁이 심했다. 삼선초등학교에서 영훈초등학교로 전학을 했다. 영훈 초등학교 교장 김영훈 교장님과 아버지의 친분이 작용된 것이다. 사립학교 학생들은 당시 옷과 가정형편이 월등하여 넥타이와 교복을 입고 다녔었다. 과외와 어머니의 관심으로 인해 성적은 상위권으로 최소 서울중학교는 무난히 합격할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6학년 1학기가 끝나고 갑자기 중학교 무시험제가 되어 사립학교로 전학한 이유가 사라지기도 했다. 소위 뺑뺑이 첫 번째 세대로 신일중학교에 입학했다. 신일 중학교는 당시 난로가 아닌 스팀시설이었고 기독교 학교로 학생임원을 하는 덕분에 이사장 집에도 가 보는 호사를 누렸다.

2. 청소년기(1969~1975)

중학교 3학년 때 어머님께서 갑자기 수술하는 바람에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중학교 때 남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했는지 학생회 간부를 지냈고 후배들의 학생회장 선거에 후원 연설도 맞아 주곤 했다. 특별한 취미나 관심사항도 없이 책가방만 들고 다녔기에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중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경복고등 학교 시험을 볼 수 있지만 안정적으로 용산고나 서울사대부고 둘 중 한 곳으로 가라고 하셨다.

서울사대부고는 남녀공학이라는 말에 솔깃하여 사대부고에 입학하게 된다.

고교시절에 반장, 부반장을 몇 차례 하며 학생회 총무부장으로 활동을 했다. 가장 아쉽게 느끼는 것 중의 하나는 공부할 시기에 공부하지 못한 것이다.

대학입시에 가장 중요한 2학년 시기에 YWCA의 스카이 서클의 회장으로 활동하느라 토요일과 일요일은 공부를 하지 못했다. 급한 마음으로 고3때 비로소 영어, 수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했지만 기본이 안 된 상황에서 성적 올리기에는 불가항력이었다.

1차 대학에 떨어지고 나서야 급 후회가 되었지만 쏜 화살처럼 되돌릴 수 없는 상황. 그러나 지금 돌이켜 보면 스카이 모임을 통해 지금도 훌륭한 선배님과 계속 교류할 수 있다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외국어대학 법정계열에 1975년 입학했다. 그 당시 무슨 자존심이 남아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2차 대학 다닌다는 것이 콤플렉스로 다가왔다. 수업에 출석하지 않고, 잔디밭에서 뒹굴고 노는 것이 대학의 낭만이라는 착각에 빠져있었다. 3차 고차원 공식을 1차 함수로서 풀려는 어리석음의 극치인 것이다. 그 당시 사회적으로도 혼란한 시대였다. 박정희 정권이 3선 개헌 이후 민주탄압을 위해 위수령이 내렸고 학교 교정에도 군인들이 진주하기도 했다. 솔직히 왜 데모해야 하는 지도 모른 채 데모행렬에 참가했지만 대학은 곧 휴교령을 내린다. 방학이 개강일보다 길었다. 대학 시절 생각나는 것은 고작 친구가 자기애인 만나러 가는 곳에 같이 가서 시간을 죽이는 일뿐이었다. 한심한 대학생활을 보낸 것이다. 자신의 운명을 남의 시선과 기준에 맡긴 채 주도적인 삶을 살지 못했다.

3. 20대와 30대, 어른이 되어(1957 -1982)

대학 2년 마친 시점에 무의미한 생활과 목적을 잃은 것에 염증을 느껴 군대에 선 지원했다. 군대 가면 사람이 된다는 근거 없는 소문을 믿은 결과다. 논산훈련소에서 후방으로 자대배치를 손꼽아 기다리는 데 청천벽력 같은 하사관으로 착출되었다. 여산에 소재한 제2하사관 학교로 발령받아 6개월 동안 지독한 훈련을 받았다. 겨울철 난방도 없고, 새벽에 팬티바람으로 운동장에 기합을 받고, 훈련복도 다 떨어진 누더기 옷으로 평생 처음 눈물 나는 고통의 시기였다. 군대 제대 후에 알량한 고시 준비를 한다고 천마산 기도원에서 하루 14시간씩 공부했지만 낙방. 4학년 졸업식을 앞두고 하산하여 기업은행에 들어간다. 공부를 통해 부모님께 제대로 효도한 번 못한 것이 연신 아쉽다. 몇 년 전에 공부법을 배워 공무원 수험생들에게 가르치는 기회가 있었다. 마음속으로 정작 공부법이 나에게 필요한 것인데 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모든 것에 때가 있다는 것을.. 무조건 공부시간을 늘린다고 공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집중력과 자신감 그리고 암기력이 공부의 승패를 좌우한다.

결혼생활(1983~ 현재)

아내 손병숙과는 고모가 중매한 것으로 첫 선 본지 6개월 만에 약혼과 그 이듬해 결혼을 한다. 연애다운 연애도 해 보지 못했기에 아내는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 다. 결혼 조건으로 나는 3가지를 기도제목에 올려놓았다. 3가지는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닌 키 큰 여자,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 양 부모님이 살아계시고 화목한 가정이다. 손권사는 경희대 간호학과를 나와 경희병원에서 근무했던 사람으로 키가 168센티이다.

부모가 되어(1984~현재)

나는 1남 1녀를 두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첫 아이가 태어난 날 세상이 달리 보이였다. 내가 부모가 되다니? 한편 자랑스럽기도 하지만 큰 부담이 되는 것은 평소 부모로서의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지 못한 탓이었다. 은행에 들어가 대리 시험 공부하느라고 정신이 없던 때였다. 본부에만 있다 보니 실무적인 계리, 회계, 기본 은행 행정절차 등에 서툴고 공부하는 요령도 모르는 혼돈의 시기였다.

중년으로 접어들어

- 42살 되던 어느 날, 1987년 IMF 영향으로 인해 쌍용투자증권이 쌍용그룹에서 외국인 주인으로 바뀌었다. 3개월 월급을 더 받고 퇴직한다. 아무런 준비도 모아둔 자산도 없이.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듯이 새한창투회가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그 후 솔로몬에셋을 공동창업하고 이전보다 즐겁고 보람된 일을 하게 되었다.

할아버지와 노년을 보내며(2017~ 현재)

- 큰 딸이 2번의 유산으로 인해 첫 아이를 갖는데 무지 신경이 쓰였다. 사돈이 근무하던 아주병원에 출산 몇 달 전에 입원하게 된다. 이 대 장녀의 손을 붙잡고 간절히 순산하기를 기도했다. 다른 어느 때보다도 간절했다. 그동안 돈을 많이 벌게 해 달라거나 좋은 직장 다니게 해 달라고 기도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만은 하나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조부모로서 자식과 손자들에게 떳떳하고 품위 있는 노인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인간 의지적으로 할 수 없는 경우에는 순종하고 감사하겠지만,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여건임에도 게으름이나 핑계를 대는 것만은 삼가겠다는 각오를 한다.

나는 크리스천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사)한국기독교직장선교엽합회에서 오랫동안 봉사하면서 크리스천 관련 책도 3권 출판했다. 하지만 미약한 믿음으로 크리스천의 본분을 제대로 하지 못함에 죄송하게 생각한다. 교회 건물에 다니는 종교인이 아닌 생활과 믿음을 일치시키려고 노력하는 성도가 꿈이다.

이 순간 가장 중요한 것은 잘 죽는 것이다. 친한 친구나 아는 분도 세상을 떠났다. 그들에 비하면 지금 숨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 아닌가?

비록 몸은 죽어 사라진다고 해도 영혼이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이 참 행복이다.

무한 경쟁과 시기 질투의 질곡을 건너면서 지쳐 쓰러진 적이 몇 번 있다. 눈에 보이는 것에만 치중하는 우를 범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나이가 들어선지 모르겠지만 하고 싶은 것 이루고 싶은 것이 마땅히 없다. 그저 공자가 말하는 오복 중의 하나인 고종명 [考終命]이 되었으면 한다.

죽는 날까지 주어진 능력을 발휘하면서 일하고 싶다. 일은 경제적 의미를 넘어 행복의 샘이 되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이 불량품으로 되기보다는 달아 없어질 때까지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나의 역사를 간략하게 소개했음에도 아쉬움이 남는다. 평범하게 살았다고 생각되어지는 데 의외로 쓸 것이 많다는 생각이 놀랍다. 동시에 인간으로서 텍스트를 역사의 족적으로 남겼다는 거룩한 부담감과 함께 자부심도 살짝 생겼습니다.

이 세상에 우리의 삶만큼 감동적인 이야기는 없습니다.

*위의 자서전 내용은 예시입니다.

독자들이 감춰진 보물을 찾는 행복한 여정에 참여하길 기원합니다.(본지는 자서전 원고를 받고 있습니다. finreview4120@financialreview.co.kr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소중한 원고는 예시와 같이 기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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