心香(심향 강상빈 박사)의 생애와 사상 5편
心香(심향 강상빈 박사)의 생애와 사상 5편
  • 강상빈 박사
  • 승인 2020.01.02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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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청소년 시절

(1) 서울사대부고 영수국 시험 JRC

서울사대부중에 14대 1로 들어온 동기생 중 서울사대부고 진학률은 50%에 그쳤다.

그 당시 고교진학시험은 종전의 전 과목 시험이 아니라 영·수·국(영어, 수학, 국어) 3과목 시험이었다.

증학교 시절 탁구 운동한다고 공부도 제대로 못했는데 운이 좋게 영·수·국 전형에 합격하여 천하부고에 입학하게 되었다.

고교 입학 후 탁구를 하지 않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결정적 이유는 앞서 밝힌바와 같이 어머니는 운동을 별로로 생각하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난 형과 달리 운동을 그만 두고 공부를 열심히 하여 이웃을 돕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마침 학교 방과 후 특별활동반에 “사랑과 봉사“를 하는 JRC(Junior Red Cross : 청소년적십자)반이 있었다.

주요활동은 주변 환경을 깨끗하게 정리 정돈하고 소외된 곳을 방문하여 사랑을 전하며 봉사활동을 하는 곳이었다.

하기 농촌근로봉사활동, 고아원방문, 군부대 위문 공연, 도로 꽃길조성 및 청소 등등으로 JRC 남녀동문들이 열심히 모여 좋은 일을 하는 특별활동반이었다.

선배님들의 열정도 대단하였다. 결국 내가 농촌살리기 생명운동을 하게 된 동기가 바로 여름방학 때 JRC농촌근로봉사활동을 한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1965년 7월말부터 8월초 10일간 강원도 원성군 신림면 신림국민학교에 캠프를 치고 하계 농촌근로봉사활동을 하였다.

남녀 재학생 40여명이 아침에 기상하여 마을청소를 하고, 아침식사를 직접 해 먹고 오전에는 국민학교 학생들을 가르치며, 오후에는 근로 봉사활동을 하고 저녁 식사 후에는 마을을 방문하여 농가에서 농민들과 친교를 나누며 준비한 위문품(치약, 칫솔, 비누, 수건 등)을 전달하는 활동을 하였다.

비록 고되고 힘들긴 하였지만, 부모님이 해주신 밥만 받아먹던 우리가 직접 밥을 해먹는 기쁨과 재미는 이루 말 할 수가 없었으며 좋은 추억들이 되었다.

특히 순박한 농촌지역 국민학교 학생들과의 수업시간과 친교시간은 잊을 수가 없었다.

10일간의 활동을 모두 마치고 헤어지는 순간 함께 했던 국민학교 4학년 학생들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나의 손을 꼭 잡으며 “선생님 가지마세요”라고 흐느끼는 모습은 서울로 돌아 후에도 오랜 동안 강한 충격으로 남아 있었다.

그 충격은 나의 인생의 목표를 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순수한 청소년 시절 나는 장래의 삶의 목표를 농촌의 어려운 아이들을 잘 양육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 생애에 어려운 농촌아이들을 100명 정도 양육하여 1인1기 교육으로 각 분야의 최우수전문가로 만들어 주는데 헌신하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최우수전문가로 성공한 100명도 사랑과 봉사의 정신으로 그들 생애에 각각 100명의 전문가를 양성하는 프로그램이 지속되면 20년 후에는 100명이지만, 40년 후에는 1만 명, 60년 후에는 100만명, 80년 후에는 1억 명, 100년 후에는 전 세계 인구가 모두 사랑과 봉사로 함께 잘사는 공동체 유토피아 세상이 될 것이라고 추상을 해보기도 했다.

그러한 복지피아 마을 조성하려면 공기 좋은 장소에서 해야겠다고 생각이 들어 1967년 1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임학과를 지원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농촌의 대부분이 산림지역임으로 숲과 산림자원을 활용하는 분야를 공부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시험 당일 사라져 버렸다. 대학시험 첫 시간 갑자기 답안지 쓰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그 당시 입시 경쟁률이 높았으며, 모두 합격을 강하게 열망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이렇게 과도한 경쟁을 하면서 어떻게 사랑과 봉사를 할 수 있겠냐? 를 반문하게 되었다.

내가 합격하면 나 때문에 떨어진 수험생이 얼마나 실망을 하겠는가?. 나는 한국에서 과도한 경쟁을 통해 대학에 입학하는 것을 하지 않고 미국 하버드대학에 진학하여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답안지 작성을 포기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심을 부모님께는 말씀드릴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내가 돈을 벌어서 유학을 가던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왜 그런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다. 청소년 시절 감수성이 너무 커서인지?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잘된 일 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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