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통한 과거리뷰] 대법원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대법원에서 유죄 취지 파기환송하면서 대선 정국이 파동을 치고 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조희대 대법원장, 주심 박영재 대법관)는 공직선거법 위반(허위사실 공표) 혐의로 기소된 이 후보에 대한 무죄를 선고한 항소심 판결을 깨고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낸다고 지난 1일 선고했다.
전원합의체는 김문기 관련 발언 중 골프 발언 부분과 백현동 관련 발언에 관한 원심의 판단에는 공직선거법 제250조 제1항이 규정한 허위사실공표죄에 관한 법리를 오해해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고 판단했다. 12명의 대법관 중 10명은 유죄 의견을 냈고, 2명은 무죄 의견을 냈다.
일제강점기 거치면서
우리나라 사법제도는 조선시대에는 3심제나 사법부 존재를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10년 일제강점기 들어서면서 대륙법 체계가 일본을 통해 조선에 들어왔다. 그러면서 최고 재판기관인 ‘대심원’이 경성(현 서울)에 설치됐다. 이에 3심제가 만들어졌다.
해방 직후 미군정은 일제의 법체계를 대부분 유지했다. 하지만 사법부 독립과 재판제도 개혁 논의가 본격화됐다.
1948년 9월 26일 대법원이 공식 출범을 했고, 초대 대법원장은 독립운동가 출신 김병로다. 김병로는 사법부의 정치적 중립성과 양심의 자유를 강조했다. 그 이유는 대법원이 국민의 최후 보루가 돼야 한다고 밝혔기 때문이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대법원의 이념적 기초가 됐다.
하지만 1960~80년대 군사정권 시기에는 사법부가 정치권력의 도구로 전락했다. 긴급조치 위반, 양심수 사건 등 인권을 무시한 판결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민주화 이후
그러나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헌법은 사법권의 독립을 명확하게 명시했다. 그러면서 1988년 헌법재판소를 신설하면서 헌법적 판단과 법률심 판단이 분리됐다. 대법원은 상고심 중심의 법률 해석 기관으로 확립됐고, 국민 기본권 보장의 핵심 축이 됐다.
하지만 2010년 들어서면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재판거래 및 판사 블랙리스트 사건이 불거지면서 사법농단 논란이 대두됐다. 권력의 재량이 재판에 개입했다는 충격적인 현실을 국민이 마주해야 했다.
그러면서 대법원에 대한 개혁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특히 해마다 수만건의 상고 사건이 대법원의 과부하 원인이 되고 있다. 이에 상고심사제 도입, 고등법원 상고부 설치 등 개편안에 논의되고 있다. 또한, 전관예우, 재판 지연, 법률서비스 격차 문제 등의 문제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