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미의 여행 테라피] 순천 쉴랑게 도장 깨기... ‘그꽃길’ 게스트하우스 꽃언니와 함께, 모든 순간이 꽃이 되다
- 꽃잎 두드리고 비누 빚는, 순천 쉴랑게의 특별한 체험 - 순천 역전시장의 생생한 맥박과 이층 양옥집의 정겨운 여정 - 40대 자매의 귀촌, 순천에서 꽃피운 '쉴랑게' 이야기
[파이낸셜리뷰=이동미 여행작가] 순천역에 내렸다. 하늘 높이 우뚝한 급수탑을 지나 동네 어귀에 들어선다. 모퉁이를 돌자 동네 어디선가 본 듯 친숙한 이층 양옥이 있다. 옹기종기 늘어선 길가 화분을 구경하다 보니, 1층 공용공간에서 환한 미소가 여행자를 맞는다. 마그넷, 키링, 엽서, 수건, 비누 등 아기자기한 기념품이 가득하다. 전 세계 관광지 마그넷이 붙어 있는 냉장고 옆에서도 동글동글 얼굴이 또 나타난다.
이곳은 자매가 함께 운영하는 쉴랑게 ‘그꽃길 게스트하우스(이하 그꽃길)’이다. 호스트는 언니 안현희 씨(마리)와 동생 안승희 씨(안냥). 수줍은 듯 아닌 듯, 빙그레 웃음 짓는 두 사람은 이름 대신 ‘꽃언니 1, 꽃언니 2’로 불리는 것이 더 잘 어울린다
급수탑 너머, 골목에서 마주한 미소
간단한 안내를 받고 ‘그꽃길’의 객실로 들어섰다. 끼익— 문이 열리자 커다란 탁자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책장마다 여행 서적이 빼곡하고, 아기자기한 소품과 인형들이 오밀조밀 놓여 있다. 꽃언니들의 손길과 취향이 곳곳에 스며든 공간이다. 이곳은 본채 1층으로 온돌방 1개와 6인 도미토리가 있고 2층에 온돌방 1개와 4인 도미토리가 있다. 바로 옆 신관은 1층이 공용공간이고 2층에 복층 온돌방이 2개 있다.
냉장고 벽에는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이 남긴 흔적이 빼곡하다. 친구와 함께 왔다며 네 컷 인생 사진을 마그넷으로 붙여두기도 하고, 가족과 방문한 아이는 커다란 공룡 그림을 남기고 갔다. 가족은 오른쪽 방에, 젊은 여행객들은 벙커 침대가 놓인 왼쪽 도미토리에 주로 묵는다. 벙커 침대에는 새하얀 침구와 프라이버시를 지켜주는 커튼, 붉은 갓을 씌운 조명이 있어 혼자만의 아늑한 공간을 만들어 준다. 흥미로운 여행책을 한 권 꺼내 소파에 앉으니, 시간은 스르르 흘러간다.
숙소를 넘어 ‘머무름’의 여행
‘쉴랑게’는 전라남도 순천시의 체류형 스테이 브랜드다. 21곳의 쉴랑게는 각각 이름을 가진 공간이자, 잠시 머물러도 오래 기억에 남는 체험의 장이 된다. 대부분의 쉴랑게가 숙소 이상의 경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곳 ‘그꽃길’ 역시 여행자를 위해 ‘잎 두드림 체험’과 ‘비누 만들기’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이는 순천의 ‘네이처 뷰티 트립’ 프로그램의 일부이기도 하다.
‘네이처 뷰티 트립’의 대표 코스는 인근 용오름 마을을 찾아 계곡에 발을 담그고, 재천사를 들른 뒤 꽃과 잎을 따서 잎 두드림을 하고, 편백잎을 활용해 비누를 만든다. 하지만 이날은 최소 인원이 모이지 않아 용오름 계곡을 가지는 못했다. 대신 동네 산책에서 얻은 꽃과 잎으로 체험을 이어갔다.
작은 나무 도마 위에 포도잎, 메리골드, 콩잎, 철쭉, 국화, 노란 코스모스, 사랑초를 정겹게 올려놓는다. 소창 손수건 위에 개성 있게 배치한 뒤 작은 망치로 두드리면 손수건에 꽃과 잎의 색과 모양이 그대로 옮겨진다.
꽃잎 두드림, 손수건 위에 피어난 작은 우주
쿵쿵쿵, 망치질 소리가 울려도 ‘그꽃길’의 마스코트 ‘아옹이’는 눈을 지긋이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는다. 이미 익숙한 소리라는 듯 시크한 몸짓이다. 손수건 위에 번져가는 나뭇잎과 꽃잎의 무늬는 자연 속 신비를 재현한 작은 메타버스 같다. 국화잎은 생각보다 짙은 초록빛을 남기고, 포도잎은 줄기 하나하나까지 선명하다. 흰 천 위에 펼쳐낸 무늬는 나만의 디자인, 나만의 작은 우주가 된다. 노란 코스모스를 여섯 잎 별처럼 붙이고, 꽃길을 따라 한 장 한 장 남긴 꽃발자국은 어느새 하늘 위를 거닌다. 순천 덕암동의 자연을 내 손으로 재창조했다는 뿌듯함이 밀려온다.
편백 향 가득한 순솝
내친김에 비누 만들기에도 도전한다. 체험은 ‘그꽃길’에서 지척인 순솝(sun soap)에서 진행된다. 순솝은 ‘순천의 비누’와 ‘순수함’을 뜻하는 더감동 협동조합의 브랜드다. 조합명은 행정구역명인 덕암동에서 라임을 차용해 만들었다.
순솝의 공간은 과학 실험실처럼 기계와 기구로 가득하다. 이곳에서는 비누 제조와 체험, 아로마 제품 만들기가 이루어진다. 용오름 마을에서 가져온 편백나무로 편백수를 짜내고, 편백잎 분말을 더해 저온 숙성 기법으로 비누를 만든다. 이렇게 완성된 비누는 순천시 정원 워케이션의 어메니티 키트로도 보내진다. 체험에서 직접 만든 비누 베이스는 틀에 부어 벽돌만 한 크기의 비누로 완성된다. 남은 편백수로는 향긋한 룸 스프레이까지 만들어 작은 성취와 뿌듯함을 보탠다.
꽃언니 자매의 귀촌 이야기
쉴랑게 ‘그꽃길 게스트하우스’의 호스트이자 더감동 협동조합의 핵심 멤버인 ‘꽃언니 자매’는 여수 송도에서 태어났다. 학창 시절은 여수와 순천의 경계쯤에서 보냈다. 그래서 늘 우스갯소리처럼 말한다.
“앞문을 열면 순천, 뒷문을 열면 여수였다.”
두 사람은 평생을 붙어 살았다. 떨어져 지낸 시간을 모두 합쳐도 5년이 채 되지 않는다. 한때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했지만, 과감한 결단 끝에 순천으로 귀촌을 선택했다.
40대 여성의 귀촌은 지방 소멸 시대에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단순한 주거 이동이 아니라 삶의 가치를 새롭게 설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소비자에 머물렀던 이들은 귀촌을 통해 로컬 비즈니스와 체험, 콘텐츠 기획을 맡으며 지역 경제의 주체로 거듭난다. 마을 공동체와 협동조합, 문화 기획, 교육, 네트워크 등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지역의 사회적 자본을 강화한다. 꽃언니 자매처럼 지역 재생의 촉매자이자 중간자가 되고, 세대와 세대, 도시와 농촌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한다. 때문에 꽃언니들의 귀촌은 ‘인구 통계적 이동’이 아니라 지역에 새로운 르네상스의 가능성을 열어 가는 일이다.
순천만 못지않은 일몰 감성
‘그꽃길’에서 자체 제작한 마을 지도를 들고 골목을 구경하며 다시 ‘그꽃길’로 돌아오니 선선한 바람과 함께 노을이 물들기 시작한다.
“옥상에서 보는 일몰이 참 좋아요.”
‘이층 벽돌 양옥집 옥상’이라는 단어만으로도 떠오르는 그 감성 그대로다. 빨간 기와 담장 너머로 순천역 급수탑이 보이고, 급수탑 어깨에 걸린 구름은 서서히 붉게 타오른다. 많은 이들이 순천의 일몰 하면 순천만을 떠올리지만, 순천역과 급수탑을 옆에 두고, 죽도봉 너머로 떨어지는 석양을 이층 양옥집 옥상에서 바라보는 풍경 또한 뒤지지 않는다.
늦은 저녁, 동네 식당 ‘입맛대로’를 찾았다. 서대회 무침을 반찬 삼고, 구수한 순천 사투리를 안주 삼아 맛있게 식사를 마쳤다. 방으로 돌아와 읽던 책을 다시 펼쳐 든다.
구수한 사투리, 시장의 리듬에 물들다
알람 소리에 눈을 뜨니 여섯 시 반. 조금 더 꼬물거릴까 고민하다가 부리나케 일어난다. 수십 갈래 기찻길을 발아래 두고 육교를 건너면 순천역, 역광장에서 왼쪽 횡단보도를 건너면 역전시장이다. 과일 좌판이 놓여 있고, 야채 가게와 떡집이 이어진다. 1970년대에 지어졌다는 건물은 커다란 기차 모양인데 깊숙이 들어갈수록 해산물 가득한 어물전이 펼쳐진다. 자그마한 번개시장 쯤으로 생각했는데, 의외로 규모가 커서 놀랍다.
아침 햇살보다 빠른 목소리들이 채소 더미와 생선 위를 넘나든다. 아삭아삭 사과와 달콤 꿀떡을 한 보따리씩 사 들고 어슬렁거리니, 어느새 순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다. 낯선 여행자에게도 상인들이 손짓하며 맛을 보라 권한다. 이게 바로 로컬 여행이지 싶다!
시장을 나서며 문득 깨닫는다. 역전시장은 그냥 장터가 아니라 순천의 맥박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취사 시설이 마련된 숙소에 머무르거나 캠핑카 여행 중이라면, 이른 새벽 역전시장에서 장을 봐 직접 요리해 먹는 것도 멋진 추억이 될 것이다.
여행의 끝자락 고백
쉴랑게 ‘그꽃길’로 돌아오니 아침상이 반긴다. 소시지와 계란프라이, 사과와 토마토, 키위, 신선한 샐러드에 치즈 한 장이 곁들여져 있다. 식빵과 잼, 커피와 레모네이드까지 정갈하다. 햇살 가득한 창가에 앉아 누군가 차려준 느긋한 아침을 받으니, 아침 햇살만큼 행복하다.
이제 어제 만든 비누를 다듬으러 간다. 비누를 적당한 크기로 자른 뒤, 스탬프를 찍어 포장 박스에 담는다. 그리고 직접 만든 꽃손수건으로 정성껏 묶으니, 세상에 하나뿐인 나만의 비누와 나만의 꽃손수건이 탄생했다. 괜스레 여기저기 자랑하고 싶어진다.
일상을 벗어나 잠시 순천의 꽃언니 집에 머물며, 손재주 좋은 꽃언니와 함께 꽃손수건을 만들고 비누를 빚으며 수다를 나누는 즐거움이 좋았다. 순천 시내를 배경으로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물드는 노을을 즐기는 느긋함도 좋았다. 아침 식사도, 아옹이와 노는 시간도, 역전시장을 거니는 경험도 모두 좋았다. 그러고 보니, 그 모든 순간이 다 좋았다!
# 간단 정보
2025 순천마을여행주간 / 2025년 9월 1일~10월 31일
그꽃길게스트하우스 / 주소 순천시 덕암삼거리 38
그꽃길 체험(예약 필요) / 잎 두드림 체험, 비누만들기 체험
식당
입맛대로 / 주소 순천시 덕암안길 31
역전시장 / 오전 8시 반 이전에 가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