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로컬 트레킹] 고산정에서 수졸당까지... 징검다리가 이은 '인문학 로드'
- 고산정~월명담~농암종택~맹개마을~이육사문학관~수졸당 잇는 힐링 코스 - 퇴계 예던길 5코스, 잊혀진 길 위에서 만난 야생의 아름다움과 선비의 숨결 - "전통은 함께 지키는 것"... 종부와 로컬 크리에이터의 아름다운 동행
[파이낸셜리뷰=조용식 기자] "대개 시골길이고 발길 닿는 대로 치고 나가는 트레킹이라 산책길이 밭인지 길인지 분간이 안 될 때도 있다.“
함께 길을 걸었던 동행자의 말처럼 안동의 ‘퇴계 예던길 5코스’ 트레킹은 날것 그대로의 매력이 있다. 안동역에 내려 로컬 여행사의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도산면 가송리.
퇴계 예던길 5코스의 시작점인 고산정을 따라 낙동강 상류의 비경 속에 650년 세월을 품은 농암종택과 옛 선비들의 발자취가 서린 '예던길'이 숨 쉬고 있다. 이번 여정은 그림 같은 정자 고산정에서 시작해 강을 건너고 숲을 지나, 따뜻한 밥상이 있는 수졸당에 닿는 코스다.
드라마 속 그 풍경, 고산정과 월명담
650년의 세월, 농암종택과 징검다리
안동 로컬 트레킹의 시작은 지난 10월 27일 국가지정문화재 명승으로 지정된 고산정(孤山亭)이다. 고산정은 정유재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동한 성재 금난수가 학문에 전념하기 위해 1564년에 지은 정자로, 강 건너편 기암절벽 아래 그림처럼 앉아 있다. 퇴계 이황도 이곳을 아껴 즐겨 찾으며 시를 남겼다고 전해진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정자는 절벽을 병풍 삼고 강물을 마당 삼아 서 있다. 정자 앞을 흐르는 강물은 달이 밝게 비친다 하여 '월명담(月明潭)'이라 불린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촬영지로 유명세를 탔지만, 여전히 고즈넉한 풍경을 자랑한다. 병풍 같은 절벽과 유유히 흐르는 강물, 그리고 그 속에 녹아든 정자는 한 폭의 진경산수화다.
고산정을 뒤로하고 강변을 따라 걷다 보면 농암종택(聾巖宗宅)에 닿는다. '어부가'를 지은 조선시대 문인 농암 이현보(1467~1555)가 나고 자란 곳으로 안동댐 수몰로 인해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약 2,000평 대지에 사당, 본채, 사랑채, 별채 등이 아늑하게 들어앉아 있다. 특히 종택의 상징인 긍구당(肯構堂)은 누마루를 개방해 낙동강의 풍광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으로, 선비의 절제된 미학을 보여준다.
많은 이들이 농암종택과 분강서원만 보고 발길을 돌리지만, 종택 끝자락, 징검다리 입구에 위치한 강각(江閣)과 애일당(愛日堂)은 절대 놓쳐서는 안 될 곳이다.
'애일당'은 1512년 농암이 부모를 위해 지은 정자다. '애일(愛日)'은 '부모님이 살아계신 하루하루를 사랑한다'는 뜻으로, 당시 70세가 넘은 농암이 90세 부모 앞에서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며 효를 다했던 유서 깊은 장소다. 이는 조정에도 알려져 선조로부터 '적선(積善)'이라는 글씨를 하사받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 앞 바위에는 일제강점기 도로 개설로 사라질 뻔했던 정자의 옛터를 알리는 '농암 선생 정대 구장'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역사의 깊이를 더한다.
종택 앞 낙동강변에는 길이 126m, 폭 1m 규모의 징검다리가 놓여 있다. 안동시가 단절됐던 '퇴계 예던길' 4코스와 5코스를 잇기 위해 지난해 6월 준공한 것이다.
징검다리 위에 서면 사방으로 펼쳐지는 낙동강의 청록빛 물살과 가송협곡의 절벽이 압도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만약 강물이 불어 징검다리를 건너기 어려울 때는 트랙터를 개조한 이동 차량이 여행객들을 안전하게 반대편으로 실어 나른다.
맹개마을 지나 만난 '예던길 5코스'
종부와 로컬의 아름다운 동행, 수졸당
징검다리를 건너면 3만여 평의 밀밭이 펼쳐지는 맹개마을과 연결된다. '맹개'는 볕이 잘 드는 강가라는 뜻이다. 마을을 지나면 본격적인 '예던길 5코스'가 시작된다.
길은 순탄치 않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날것'의 느낌 때문이다. 좁은 산길은 풀이 무성하고, 일부 구간은 정비가 필요해 보일 만큼 거칠다. 하지만 그 덕분에 인공적인 소음 하나 없는 고요함과 마주할 수 있다. 이름 없는 동산을 치고 오르며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쯤, 나무 틈새로 비치는 낙동강의 비경은 그 수고로움을 잊게 한다.
거친 산길을 빠져나와 백운지 마을을 지나면 비로소 편안한 임도가 나타난다. 여기서부터는 이육사 문학관을 지나 수졸당까지 이어지는 평온한 걷기 여행이다. 저항 시인 이육사의 고향인 이곳에서 그의 문학적 향기를 느끼며 걷는 맛 또한 각별하다.
2시간 남짓한 트레킹의 종착지에는 수졸당(守拙堂)이 기다리고 있다. 이 집의 이름은 퇴계 종가로부터 분가한 퇴계의 셋째 손자 동암 이영도 선생의 아들인 이 기(李 岐)의 호 '수졸(守拙)'을 따서 지은 것이다. "항상 겸손하고, 고개를 숙이며, 나서지 말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곳에서의 식사는 특별하다. 종부가 직접 차려내는 소찬(素饌)은 화려하지 않지만 깊은 맛을 낸다. 텃밭에서 기른 채소와 직접 담근 장으로 만든 정갈한 반찬들은 지친 여행자의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채워준다.
주목할 점은 수졸당이 지켜가는 '전통의 방식'이다. 연로하신 종부님을 도와 고택 운영을 함께하는 지역의 여행사와 로컬 크리에이터들이 있다. 이들은 "종가의 전통을 지키는 일은 이제 더 이상 종가만의 의무가 아닌 우리 모두의 의무"라고 입을 모은다.
이러한 뜻을 모아 유두차사, 불천위제사 등의 제사에 관광객의 참관을 허락받아 '제사 투어'를 진행하고 있다. 파격적인 제안을 한 지역 업체와 그것을 받아들인 수졸당, 모두가 우리 전통을 지켜나가는 파수꾼이다.
가성비와 가심비 잡은 '안동 로컬 트레킹'
안동 가송리 일대는 반경 7km 안에 역사와 문화, 자연이 모두 모여 있다. KTX-이음을 이용해 수도권에서 2시간이면 닿을 수 있고, 로컬 여행사의 차량 지원으로 이동의 불편함도 덜었다.
고산정의 절경에서 시작해 야생의 예던길을 걷고, 수졸당의 따뜻한 밥상과 사람 이야기로 마무리하는 여정.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며 걷는 힐링의 시간, 안동 예던길이 주는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