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미의 여행테라피] 번아웃 일상의 현대인이 차를 만나는 법 ― 순천 선암사에서 배우는 구증구포(九蒸九曝)의 지혜

- 아홉 번 찌고 말리는 '기다림'... 번아웃을 치유하는 '식힘의 미학' - 깊게 뿌리 내린 '심근성'의 지혜... 삶을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힘 -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찻잎처럼... 일상 속 '쉼'으로 본질을 남기다

2025-12-19     이동미 기자

[파이낸셜리뷰=이동미 여행작가] 현대인은 피곤하다. 일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쉼은 밀려나 피로는 일상이 되었다. 독일에서 활동하는 철학자 한병철은 그의 저서 『피로사회』에서 현대인의 피로를 이렇게 설명한다. “타인에 의해 강요된 억압의 결과가 아니라, 자신을 끊임없이 몰아붙이는 자기착취의 산물이다.” 단순한 육체적 피곤함만은 아니다. 멈추지 못하는 상태, 쉬어도 죄책감을 느끼는 감정,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불안해지는 마음의 구조다.

순천 선암사에서 만난 야생작설차(野生雀舌茶)는 현대인의 삶에 여러 질문을 던진다. 야생차와 구증구포(九蒸九曝)의 차 제작 방식은 자기착취의 논리와 정반대에 서 있기 때문이다. 아홉 번 찌고(蒸), 아홉 번 말리는(曝) 구증구포는 차나 약재를 만들 때 쓰이는 전통적인 방식이다. 그렇다면 왜 한 번에 말리지 않는 것일까? 맨손으로 가마솥에 찻잎을 덖으며 삶의 이치를 전하는 대한민국 식품명인 제18호 야생작설차 신광수 전통 명인과 더불어 ‘식힘의 미학’을 배워 본다.

1증 1포, 차나무를 만나다

돌돌돌 물소리를 들으며 순천 선암사에 오르면 길옆과 사찰 뒤편으로 야생차밭이 펼쳐진다. 순천 조계산 일대는 차나무가 자생하기에 매우 적합한 기후와 지형을 품고 있다. 이곳에서 자란 차는 오랜 기간 공양과 수행의 일부로 자리 잡아 왔으니, 천년을 이어온 순천 선암사의 야생차밭이다.

이곳 차나무에서 눈여겨볼 점은 바로 ‘심근성(深根性)’이다. 재배 차나무와 달리 야생 차나무는 뿌리가 자기 키의 세 배에 이르며, 땅속뿌리가 2m 60cm에 달하는 것도 보았다 한다. 그래서 선암사 야생차를 설명할 때 “뿌리가 깊이 내려가는 심근성으로 토양의 기운을 오래 축적한다”고 말한다. 지속력을 만드는 것은 보이지 않는 뿌리의 깊이, 심근성에 있다.

2증 2포, 명인의 손을 보다

갓 딴 찻잎은 약 90%의 수분을 품고 있다. 야생작설차의 전통 제조·재배·제다법을 계승하는 신광수 명인은 찻잎을 채취해 가마솥에 아홉 번 덖고 말리는 전통 방식을 고수한다. 생찻잎은 풋내와 떫은맛, 자극적인 성질이 강하지만, 고온 증기로 찌는 과정에서 떫은 성분이 줄고 약성(藥性)은 안정된다. 서서히 건조하는 과정에서는 수분이 단계적으로 줄어들며 향과 기운이 정돈된다. 이렇게 찌고 말리기를 반복해 수분을 3~4%까지 낮춘다.

현대식 기계를 사용하면 손쉽고 빠르게 수분을 날릴 수 있음에 반해 전통 구증구포는 의도적으로 속도를 늦춘다. 명인의 손끝은 그저 찻잎의 상태를 먼저 묻는다. 아직인가? 괜찮은가? 더 기다려야 하는가? 우리는 늘 “언제 끝나느냐”를 묻는다. 구증구포의 찻잎 덖기는 ‘빠름’이 아니라 ‘충분함’을 말하고 있다.

3증 3포, 일상다반사를 가져오다

구증구포의 ‘아홉 번’은 숫자라기보다 ‘반복’이라는 태도에 가깝다. 일상성과 반복성을 뜻하는 일상다반사(日常茶飯事)는 차에 담긴 철학을 우리의 일상에 녹여 넣으라는 의미다. 데워지고, 식혀지고, 다시 데워지는 과정에서 차는 점점 제 향을 찾아가며 완성도를 높인다. 우리의 삶도 그러하다.

번아웃은 너무 많은 열을 쓰다 생긴다. 쉬지 않고 달리고, 식히지 않은 채 다시 달린다. 열이 올라가면 반드시 식혀야 하고, 식힌 뒤에야 다시 움직일 수 있다. 하루의 리듬 속에 작은 ‘식힘의 시간’을 넣는 것, 그것이 구증구포의 지혜이자 교훈이다.

4증 4포, 차 맛을 느끼다

선암사 야생차밭에서 자라 구증구포를 거친 명인의 차를 한 모금 마셔 본다. 강하게 튀지 않는다. 향은 조용하고, 맛은 둥글다. 카페인의 자극처럼 급격한 각성 대신 ‘서서히 맑아지는 느낌’이 찾아온다. 우리는 늘 즉각적인 반응을 기대하고 빠른 것에 익숙해지는 소비 방식을 택한다. 하지만 차는 기다릴 줄 아는 몸에게만 진가를 드러낸다. 바로 느껴지지 않아도 괜찮다. 당장의 성과가 없다고 해서 헛된 시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5증 5포, 티 블렌딩을 하다

명인의 가족은 가마솥에 덖는 전통 방식을 계승하고 있다. 아들 희찬 씨는 식품공학을 공부하고, 딸인 선미 씨는 차 블렌딩으로 차 문화를 대중과 잇고 있다. 구증구포가 반복 속에서 불필요한 자극을 제거하듯, 제다법을 응용한 티 블렌딩은 삶의 과잉 속에서 덜어낼 것은 덜어내고, 새로운 것을 더해 나만의 향을 살려내는 일이다. 우리는 덜어내는 선택을 늘 어려워한다.

6증 6포, 씨앗과 꽃을 보다

차밭을 거닐다 차나무를 들여다보니 꽃이 보이고, 동글동글한 검은 씨앗도 눈에 띈다. 차나무는 꽃이 핀 뒤 약 1년의 시간이 지나 열매와 씨가 익지만, 이렇게 시간이 겹치며 지난해의 결실과 올해의 꽃이 한 나무에 공존하기도 한다. 차나무는 ‘시간이 겹치는 식물’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품고 살아간다. 다음 단계를 향해 달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나온 시간과 다가올 시간도 함께 안고 살아야 한다.

선암사

7증 7포, 공생을 이해하다

편백 군락 사이, 대나무밭 아래에도 야생차밭은 푸릇푸릇 싱그럽다. 같은 땅을 쓰되, 서로 다른 뿌리 전략과 서식법으로 공존한다. 선암사의 야생차밭 생태계는 경쟁이 아닌 공생으로 유지된다. 역할을 나누고 방향을 달리하며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구조, 모두가 한 방향으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어울렁더울렁’ 살아가는 모습이다.

8증 8포, 차를 쐬다

다올재에 들러 뜨거운 물에 차를 우리고, 피어나는 김을 얼굴에 쐬며 차훈증을 한다. 차향이 스며들고 호흡은 자연스럽게 깊어진다. 그저 천천히 숨 쉬며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긴다. 코가 트이고, 눈이 맑아진다. 회복은 ‘맡김’에서 시작된다. 얼굴로 차를 마신다.  

9증 9포, 차로써 삶을 마시다

선암사를 떠날 즈음, 차나무의 뿌리와 씨앗의 소리, 명인의 손길, 얼굴에 스며든 차향까지 기억으로 남는다. 차의 방식이 몸과 생각 속으로 스며든다.

번아웃의 현대인은 이제 안다. 삶도 차처럼 한 번에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번 데워지고, 여러 번 식혀지며 그 과정에서 불필요한 자극은 사라지고 본질만 남는다는 것을. 번아웃의 시대에 선암사의 야생차가 주는 선물은 바로 이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강한 자극이 아니라, 천천히 식어 갈 수 있는 시간이다.

간단 여행 정보

선암사 / 전남 순천시 승주읍 선암사길 450 / 유네스코 세계유산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등재, 승선교(보물 제400호)

명인신광수차 / 전남 순천시 승주읍 선암사길 386 / 다례 체험 및 티 블렌딩, 무차(moocha) 선물세트 판매

다올재 / 전남 순천시 금곡길 60 / 차훈증 체험, 한옥 스테이 가능

만듦새(병과점) / 전남 순천시 장천2길 3 / 과일 찹쌀떡 쿠킹 클래스, 이바지 음식

길상식당 / 전남 순천시 승주읍 승암교길 8 / 산채정식, 더덕정식

금빈회관 / 전남 순천시 장명4길 8 / 소떡갈비·돼지 떡갈비 정식

순천 시티투어 / 전남 순천시 연향동 751 / 순천역 앞 승차, 순환·선암사·송광사 코스 있음

정원 워케이션 / 전남 순천시 해룡면 생태배움길 85 / 60만 평 정원, 캐빈하우스 & 에코촌 숙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