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리뷰] 400년 동암종택 빗속 길사, 진성이씨 새 제주·종부 탄생
- 400년 안동 고택 처마 밑 울려 퍼진 장중한 홀기 낭독 - 조상 신주 밖으로 모시는 출주례, 종가의 엄격한 격식 - 노종부의 먹먹한 눈물 속, 새 종부 아헌례로 대를 잇다 - 궂은 날씨에도 흔들림 없는 진성이씨 문중원, 굳건한 뿌리 증명
[파이낸셜리뷰=조용식 기자] "제집사 예 관세위(諸執事 詣 盥洗位)."
지난 5월 3일, 봄비가 굵게 내리는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자리한 수졸당(守拙堂)의 풍경이다.
하얀 도포를 차려입고 갓을 쓴 집례(길사 사회자)의 장중한 창(唱)이 400년 고택의 처마 밑 빗소리를 뚫고 울려 퍼졌다. 퇴계 이황의 손자인 동암 이영도 종택 수졸당에서 가문의 대를 이을 새로운 제주(祭主)와 종부(宗婦)의 탄생을 조상과 문중에 알리는 '동암종택 길사(吉祀)'의 막이 오르는 순간이었다.
400년 역사 응축된 길사, 홀기 낭독으로 막 오르다
길사는 현대인에게는 다소 생소한 전통 의식이다. 고인의 기일에 맞춰 슬픔과 추모의 마음으로 지내는 일반적인 기제사(忌祭祀)와 달리, 길사는 상기(喪期)를 무사히 마치고 새로운 종손과 종부가 제사를 주관하게 되었음을 조상에게 고유(告由)하는 경사스러운 성격을 띤다.
한 세대에 단 한 번, 제사의 책임자가 바뀌는 결정적인 전환점에만 봉행되기에 문중의 가장 중요한 행사로 꼽힌다. 따라서 이번 수졸당 길사는 종가의 엄격한 제례 법도와 400년 역사의 무게가 고스란히 응축된 현장 그 자체였다.
길사의 모든 과정은 집례가 낭독하는 제사 대본인 '홀기(笏記)'의 엄격한 지시에 따라 통제된다. 집례의 첫 창인 "제집사 예 관세위"는 제물을 다루고 실무를 보조할 참사자들에게 손을 씻는 대야가 놓인 자리로 나아가라는 명이다.
집례의 "관세(盥洗)"라는 짧고 굵은 지시가 떨어지면, 집사들은 맑은 물에 손을 씻고 수건으로 닦아낸다. 이는 신성한 조상의 의식에 앞서 몸과 마음의 부정을 씻고 정결함을 갖추기 위한 유교 제례의 필수적인 절차다.
정결 의식을 마친 뒤, 집례는 "설 소과 잔 시저(設 蔬果 盞 匙箸)"를 창한다. '설'은 진설하다, 즉 상에 차려 올린다는 뜻이며, '소과'는 나물과 과일 등 식물성 제물을, '잔'은 술잔을, '시저'는 숟가락과 젓가락을 의미한다. 조상의 신주를 밖으로 모셔 오기 전에 제상 위에 기본적인 제물과 식기를 법도에 맞는 위치에 정확히 올려놓으라는 지시다.
조상 신주 모시는 출주례, 400년 종가의 엄격한 진설
진설이 끝났음이 현장에서 보고되자 집례는 길사의 핵심 절차 중 하나인 "출주(出主)"를 명했다. 출주는 사당 내부에 모셔둔 조상의 신주(神主)를 사당 밖 제청(제사를 지내는 장소)으로 모셔 내라는 뜻이다.
길사나 불천위 제사 같은 큰 문중 행사에서는 평소처럼 사당 안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고, 신주를 밖으로 내어와 별도로 마련된 넓은 공간에서 성대하게 제사를 지내기 때문에 이 절차가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주인 예 사당(主人 詣 祠堂)." 여기서 '주인'은 제사를 주관하는 주상주, 즉 이번 길사를 통해 수졸당의 제사를 새롭게 책임지게 된 새로운 제주를 뜻한다. 출주를 위해 조상의 신주를 직접 모시러 사당으로 향하라는 명에 따라, 옥색 띠를 두른 연녹색 도포에 갓을 쓴 새로운 제주 일행이 조심스럽고 경건한 발걸음으로 사당 안으로 들어섰다.
신주가 모셔져 나올 밖의 제청에는 400년 종가의 격식을 증명하는 거대한 제상이 이미 완벽하게 차려져 있었다. 제청 문 위로는 길사에 참여한 조상과 후손들의 연원이 적힌 긴 현수막이 걸렸고, 묵직한 방짜유기 위로 붉은빛의 사과, 대추, 곶감과 흰빛의 배, 밤, 잣이 엄격한 층고를 맞추어 진설되었다.
또한, 다식과 약과 곁으로 생닭과 붉은 생고기, 커다란 생선적, 화려한 떡고임이 자리하여 종가 특유의 풍성하면서도 정제된 제례 문화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빗속 마당 가득 메운 문중원, 초헌례로 고하는 새 역사
제청에 신주가 자리 잡자, 새 제주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첫 번째 잔을 올리는 초헌례(初獻禮)를 행했다. 제관들이 숨을 죽인 가운데 집례가 "축 독축(祝 讀祝)"을 명했다.
축관이 제주의 곁에 엎드려 축문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유 세차 병오 삼월 신유 삭 십칠일 정축(維 歲次 丙午 三月 辛酉 朔 十七日 丁丑)…." 2026년 음력 3월 17일, 새로운 세대가 조상 앞에 섰음을 고하는 이 낭독은, 수졸당의 새 제주가 평생 짊어지고 갈 역사의 무게를 문중 안팎에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순간이었다.
제청에서 제주의 헌작이 이어지는 동안, 도포 자락을 여미고 갓을 쓴 후손들은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당에 설치된 연녹색 천막 아래 하얀 천 위에 일제히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이 웅장하고 장엄한 광경을 마당 한편에서 조용히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수십 년간 수졸당의 제사를 모시고 수많은 빈객에게 건진국수를 대접하며 묵묵히 종가의 험난한 살림을 지켜온 전임 종부 윤은숙 어르신이었다.
거친 살림의 훈장처럼 하얀 반창고가 감긴 손으로 얼굴을 매만지던 그녀의 시선은 마당 한가운데 세워진 대형 스크린을 향해 있었다.
화면 속에 화려한 혼례 예복을 차려입은 새로운 종부의 모습이 보이자, 윤은숙은 곁에 있던 전미경 경국대 교수에게 "종부가 어딨노?"라고 조용히 물었다. 이에 전 교수가 "저기 종부가 있네요"라며 시선을 이끌자, 윤은숙은 묵묵히 새 종부가 위치한 제청 쪽을 응시했다.
평생을 바쳐 짊어졌던 무거운 짐을 무사히 후대에게 넘겨주었다는 안도감과, 새로운 시대를 짊어질 새 종부에 대한 대견함이 교차하는 먹먹한 응시였다.
노종부의 먹먹한 응시 속, 새 종부 아헌례로 대를 잇다
제청 한가운데에는 붉은 예복을 입고 화려한 족두리를 쓴 새로운 종부가 단정히 앉아 있었다. 그 곁에는 분홍색과 푸른색 한복을 입은 여인들이 양옆에서 새로운 종부를 돕고 있다.
이 장면은 길사의 가장 핵심적인 순서 중 하나인 '아헌례(亞獻禮)'를 준비하는 모습이다. 첫 번째 잔을 올리는 초헌례에 이어 두 번째 잔을 올리는 아헌례는, 종가의 안주인으로서 새로운 종부가 조상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는 절차다.
새로운 종부의 화려한 예복은 이 의식의 중요성과 경사스러움을 강조하며, 그녀의 다소 긴장한 듯한 표정은 새롭게 맡게 된 무거운 책임감을 보여준다.
이때, 제청 밖에서 집례의 엄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행 아헌(行 亞獻)." 집례의 지시가 내려지면, 이는 새로운 종부에게 두 번째 잔을 조상에게 올리라는 뜻이다. 집례의 명에 따라 집사들이 움직이며 새로운 종부가 조상에게 술잔을 올릴 수 있도록 돕는다.
집례의 단호한 지시에 맞춰 새 종부가 조상에게 두 번째 술잔을 들어 올렸다. 정성스럽게 쳐든 이 잔이 제상에 오름과 동시에, 400년을 이어온 동암종택 수졸당의 묵직한 역사 위에 새로운 종부의 이름이 정식으로 깊게 새겨졌다.
비록 하늘에서는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지만, 동암종택 수졸당의 길사는 흔들림 없이 치러졌다. 진성이씨 문중원들은 궂은 날씨 속에서도 자리를 지키며 가문의 역사가 새롭게 쓰이는 순간을 묵묵히 함께했다.
새로운 제주가 낭독한 축문이 조상에게 전해지고 의식이 마무리되면서, 수졸당은 또 다른 역사를 향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전통이 옅어지는 현대 사회 속에서도, 안동 도산면 토계리의 수졸당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조상의 숨결을 잇는 굳건한 뿌리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