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작은 기록이 황등의 역사가 됩니다’… 112년 역사 집대성하는 채수훈 황등면장
- 112년 숨결 담은 '황등면지', 단순 기록 넘어 미래 이정표 - '작은 기록이 역사로'... 58개 마을 누비며, 행정 및 사료 발굴 - 익산 최초의 '왕궁면지' 발간, 고향의 역사 담는 것이 '마지막 소망'
[파이낸셜리뷰=조용식 기자] “면지는 박제된 기록이 아닌 현재의 경제와 숨 쉬는 스토리텔링 자산입니다. 주민 자료와 현장 구술을 결합해 황등을 다시 찾고 싶은 매력적인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청사진을 완성하고 있습니다.”
2026년 연말 정년퇴직을 앞둔 채수훈 황등면장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서려 있다. 1993년 사회복지 공무원으로 공직에 입문해 32년 동안 현장을 지켜온 정통 행정가인 그는, 최근 에세이 『익산 이야기 꽃으로 피다』를 출간하며 지역사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이제 그는 자신의 고향인 황등면의 112년 역사를 집대성하는 ‘황등면지’ 편찬이라는 마지막 과업에 모든 에너지를 쏟고 있다.
익산 최초의 '왕궁면지' 성공 경험, 고향 황등서 꽃피운다
채 면장이 지역사 기록에 천착하게 된 연원은 공직 임용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3년에 사회복지 공무원으로 들어왔는데, 그때 마침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나와 전국적인 열풍이 불었습니다. 당시 전국을 누비며 남의 유산만 찾던 제 모습에서 정작 고향 익산의 역사에는 무지했다는 부끄러움을 느꼈고, 그때부터 익산의 골목과 들녘을 직접 걷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열정은 2021년 왕궁면장 부임 당시 주민들의 자긍심을 높이기 위한 ‘왕궁면지’ 편찬으로 이어졌다. 행정의 공신력과 주민의 자발적인 참여가 결합해 1억 3,500만 원의 예산을 마련했고, 1년 1개월 만에 기념비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채 면장은 “시장님에게 퇴임 3년 전부터 고향으로 보내달라고 간곡히 요청했지만, 본청 업무로 인해 1년을 남기고서야 비로소 이곳에 올 수 있었습니다”라며 고향에 대한 애틋한 진심을 전했다.
그가 마주한 황등면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이후 112년의 역사를 품은 역동적인 공간이다. 황등은 고대 호남(호수의 남쪽)이라는 지명의 기원이 된 ‘황등호’가 있던 전라도 역사의 시원과도 같은 곳이다.
일제강점기 산미증식계획과 철도 부설을 거치며 황등역을 중심으로 오일장과 관련 물산이 크게 번성했고, 청와대와 국회의사당, 독립기념관 등에 광범위하게 쓰인 황등석 채석 산업이 지역 경제의 중추로 자리 잡았다. 특히 동연교회를 구심점으로 파생된 치열한 계몽 운동과 학교 설립, 신용협동조합 창립 등 지역 인물들이 남긴 근대 교육 및 생활사를 이번 면지에 가장 무게를 두고 상세하게 수록할 계획이다.
채 면장은 “황등면지는 단순히 유물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황등역과 오일장을 통해 번성했던 물산의 역사, 그리고 동역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치열한 계몽운동과 교육 운동 등 인물 중심의 생생한 생활사를 담아 황등만의 독보적인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장 조사가 곧 행정", 사료 조사부터 복지 사각지대까지
채 면장은 지난 4월부터 오는 6월까지 두 달 반의 강행군으로 관내 58개 마을 전수조사를 직접 이끌고 있다. 익산근대연구소 연구진과 함께 마을 곳곳의 흙먼지를 마시며 유래와 지명, 숨겨진 문화유적을 발굴하는 현장 조사는 매 순간이 새로운 사료와의 조우이자 현실적인 한계와의 치열한 싸움이다.
“현장에 파고들수록 기존 문헌에 없던 흥미로운 인물사와 미시사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고령화된 마을 현장에서 어르신들의 엇갈리는 기억을 일일이 교차 검증해야 하는 까다로운 작업이 수반되지만, 112년 황등 역사의 퍼즐을 정교하게 맞추는 과정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번 마을 전수조사가 단순한 과거 기록 수집에 그치지 않고, 황등면의 현재 행정 현안과 복지 실태를 동시에 점검하는 복합적인 목적을 띠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의 발자취를 찾는 기록 조사와 나란히, 홀로 사는 어르신들의 복지 사각지대를 발굴하고 파손된 도로 및 가로등 같은 생활 시설을 꼼꼼하게 살피는 현장 행정이 병행되고 있다.
이 방대한 기록화 작업은 행정의 일방적인 주도를 넘어 면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내는 구체적인 소통 전략을 통해 완성된다. 현재 황등면 곳곳에 배포된 홍보물에 명시된 ‘작은 기록이 황등의 역사가 됩니다’라는 구호처럼, 편찬위원회는 2026년 8월 31일까지 옛 사진과 마을 기록, 족보, 일기 등 주민들의 소장 자료를 집중적으로 수집하고 있다.
“32년 사회복지 행정가의 노하우를 십분 발휘하고 있습니다. 어르신들의 굽이진 하소연을 묵묵히 들어주고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면, 굳게 닫혔던 마음의 문이 열리고 귀중한 사료를 기꺼이 내어놓으십니다.”
'작은 기록'이 모여, 황등의 미래 이정표 된다
황등면지 편찬을 위한 현실적인 재원 마련은 김옥산 민간위원장을 필두로 한 편찬위원회의 헌신과 행정의 공신력이 견고한 시너지를 내며 순조롭게 진행 중이다.
총 1억 5천만 원 확보를 목표로 2026년 연말까지 현금 후원과 더불어 ‘고향사랑 기부제’를 통한 특정 사업 지정 기부를 독려하고 있다. 특히 이번 사업은 익산시 최초로 고향사랑 기부제 특정 기부 사업으로 단독 승인을 받았으며, 4월 1일부터 시작된 집중 모금에서 불과 한 달 만에 1,200만 원이 접수되는 등 출향민들의 폭발적인 공감대를 이끌어냈다.
채 면장의 시선은 2026년 연말 면지 발간이라는 과거의 갈무리를 넘어, 발굴된 자원을 지역 경제 활성화로 연계하는 미래 청사진을 향해 있다.
모인 예산 중 8천만 원에서 1억 원가량은 출판 자체에 투입하고, 나머지 잉여 재원은 텍스트 위주의 단순 책자 발간을 탈피하는 다각적 기록화 사업에 온전히 투자한다. 58개 마을의 서사를 담은 20분 분량의 다큐멘터리 영상 제작, 관내 경로당 전체에 배부할 드론 촬영 및 주민 단체 사진 대형 액자 제작, 향후 역사 갤러리 조성을 위한 주요 사진 50점 확보 등이 동시에 추진된다.
이렇게 완성된 황등면지와 시청각 기록물들은 출판기념회와 전시회를 거쳐 지역 향토 교육의 교재로 쓰일 예정이다. 나아가 아가페 정원 및 황등석산과 연계된 매력적인 문화 관광 자원으로 소비되며, 침체된 지역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핵심 콘텐츠로 진화할 것이라는 게 채 면장의 설명이다.
마지막으로 지역 주민들에게 남기고 싶은 궁극적인 유산과 행정 책임자로서의 포부를 묻는 질문에 채 면장은 흔들림 없는 결론을 제시했다.
“척박한 채석장 노동자의 삶부터 오일장의 번성기까지 황등의 애환이 고스란히 서린 이 방대한 기록물이 훗날 후세들에게 지역의 뿌리를 일깨우고 면민 공동체의 자긍심을 세우는 살아있는 이정표로 전달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