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100점짜리 술도 해외에선 80점"... 국순당 박선영 본부장이 말하는 K-주류의 과제
법고창신 프로젝트에서 찾은 해답...생막걸리 개발 비화 공개 "막걸리는 싸야 한다?"...저평가된 우리 술의 가치 재조명 "표준화·등급화 필요"...K-주류 세계화 위한 과제 제시
[파이낸셜리뷰=김희연 기자] "옛 문헌에 '썩은 냄새가 날 때까지 쌀을 물에 담가두라'는 기록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죠. 그런데 실제로 해보니 그 냄새가 술을 빚고 나서는 과일 향으로 바뀌더라고요. 그때 옛 기록이 그냥 나온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오늘날 막걸리는 편의점과 마트 어디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대중적인 술이 됐지만,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유통과 보관이 쉽지 않은 술이었다. 발효가 계속 진행되는 생막걸리 특성상 가스가 발생해 용기가 부풀거나 술이 새는 일이 잦았고, 유통 과정에서 맛이 변하는 문제도 있었다.
국순당 생막걸리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며 국내 생막걸리 시장 성장의 전환점이 된 제품으로 평가받는다. 그 배경에는 효모 연구를 바탕으로 전통 양조법과 현대 발효 기술을 접목해온 박선영 국순당 생산본부장의 노력이 있었다.
석사 시절 효모를 연구하던 그는 배상면 국순당 창업주가 술을 발효하고 맛보는 모습을 접한 뒤 "효모로 술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에 2002년 국순당 연구소에 입사했다고 한다.
생막걸리를 비롯해 옛날막걸리 古, 1000억 유산균 막걸리 등 국순당의 대표 제품 개발에 참여해 왔으며, 현재는 생산본부장으로서 횡성양조장의 생산과 품질 관리를 총괄하고 있다.
지난 17일 강원도 횡성군에 위치한 국순당 양조장에서 만난 박 본부장은 생막걸리 개발 비화부터 우리 술 산업의 과제, 그리고 제품에 대한 남다른 애정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가 가장 인상 깊게 기억하는 순간 중 하나는 국순당의 전통주 복원 프로젝트인 '법고창신(法古創新)' 과정에서 만난 고문헌이었다. 옛 양조서에는 쌀을 짧게는 하룻밤, 길게는 사흘 동안 물에 담가두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박 본부장은 "당시에는 쌀이 귀한 시절이었는데도 은행 열매 냄새가 날 정도로 오래 물에 담가두라는 기록이 있었다"며 "직접 실험해보니 술을 빚고 난 뒤에는 오히려 향긋한 과일 향이 났다. 옛사람들의 경험과 지혜가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고 회상했다.
박 본부장은 고문헌 연구를 통해 얻은 양조 기술과 아이디어를 생막걸리 개발에 접목했다. 당시 생막걸리는 살아 있는 효모와 유산균이 계속 활동하는 특성상 시간이 지날수록 맛이 변하고 가스가 발생하는 문제가 있었다.
그는 효모의 활성을 조절하는 발효제어기술을 통해 이러한 한계를 극복했다. 박 본부장은 "쉽게 말하면 효모에게 주는 먹이를 조절하는 것"이라며 "이 원리를 적용해 생막걸리의 맛 변화를 줄이고 안정적인 품질을 구현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약 2년간의 연구 끝에 2009년 출시된 국순당 생막걸리는 발효가 계속되는 생막걸리를 안정적으로 유통할 수 있는 길을 열며 국내 생막걸리 시장의 성장을 이끈 제품으로 평가받는다.
생막걸리가 효모의 활성을 제어한 제품이라면, 1000억 유산균 막걸리는 유산균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설계한 제품이다. 박 본부장은 "가장 손이 많이 가는 제품이지만 유통기한은 가장 짧다"며 "특히 여성 소비자들의 반응이 좋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옛날막걸리 古는 전통 막걸리의 원료 비율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제품이다. 우리나라 전통 막걸리는 쌀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밀누룩을 함께 사용하는데, 옛날막걸리 古는 이러한 전통 양조 방식의 특징을 강화했다. 박 본부장은 "도수가 비교적 높고 풍미가 진해 막걸리를 즐겨 마시는 소비자들에게 특히 인기가 많다"며 "전통 막걸리의 맛을 선호하는 중장년층 소비자들의 반응도 좋은 편"이라고 말했다.
좋은 술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박 본부장은 국순당 술의 강점으로 '생쌀발효법'을 꼽았다. 생쌀발효법은 쌀을 찌지 않고 가루 낸 생쌀과 상온의 물을 사용해 술을 빚는 방식으로, 백세주와 생막걸리 등 국순당의 주요 제품에 적용되고 있다.
좋은 술을 만드는 일은 단순히 맛을 평가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안주와의 궁합은 물론 취기가 오르는 과정에서의 맛 변화, 음주 후 몸의 반응까지 살펴야 한다.
박 본부장은 "그냥 한 잔 마실 때와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 마실 때의 느낌이 다르다"며 "제품 개발 과정에서 일부러 취해보기도 하고, 한 병을 마신 뒤 음주측정기로 시간이 얼마나 지나야 수치가 떨어지는지 확인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오랜 시간 공을 들여 탄생한 제품인 만큼 애정도 남다르다. 그는 자신이 만든 술을 '자식 같은 존재'라고 표현했다.
"제품을 개발하거나 생산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만든 제품이 자식처럼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마트 진열대에 놓인 제품을 보면 괜히 신경이 쓰여요. 소비자들이 관심을 가져줄지, 맛있게 먹어줄지 궁금하죠. 소비자가 제품을 집어 들면 기분이 좋고, 만져보다가 다른 제품을 선택하면 조금 서운하기도 합니다. 아마 제품이 자식 같다는 게 그런 마음인 것 같습니다."
"막걸리는 싸야 한다?"...저평가된 우리 술의 가치
박 본부장은 막걸리가 지닌 가치에 비해 여전히 저가 이미지가 강하다는 점을 아쉬운 부분으로 꼽았다.
"소비자 조사에서는 '유산균이 많으면 좋겠다', '국내산 쌀로 만들면 좋겠다', '전통적인 제조 방식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말씀하면서도 실제 시장에서는 결국 가격이 선택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 막걸리 시장의 상당수 제품은 가격 경쟁력을 이유로 수입산 원료를 사용하고 있다. 시장 점유율을 봐도 상대적으로 저렴한 제품들이 판매량 상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막걸리는 쌀을 씻고 분쇄한 뒤 발효와 숙성, 블렌딩 과정을 거칩니다. 최소 15일 이상이 걸리는 제품이에요. 그런데 아직도 '막걸리는 싸야 한다'는 인식이 남아 있는 것 같아 조금 안타깝습니다."
다만 그는 최근 프리미엄 막걸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국내 소비자들은 와인이나 위스키를 주로 프리미엄 제품 위주로 접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기준이 높아진 측면이 있습니다. 실제로 현지에서는 3년산, 6년산 같은 대중적인 위스키도 많이 소비되지만 국내에는 상대적으로 고급 제품 중심으로 소개되는 경우가 많죠.
전통주 역시 프리미엄 제품만으로 시장이 성장할 수는 없습니다. 대중주 시장이 받쳐줘야 프리미엄 시장도 함께 커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막걸리 시장 규모는 과거 1500억~1600억원 수준에서 현재 4000억원대로 성장했다. 박 본부장은 "예전에는 막걸리 시장 자체가 크지 않아 지금과 같은 프리미엄 시장도 사실상 존재하기 어려웠다"며 "대중적으로 막걸리를 즐기는 소비자가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프리미엄 제품에 대한 관심도 함께 커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결국 더 많은 소비자가 우리 술을 접하고 좋아하게 돼야 시장 전체가 성장할 수 있다"며 "국순당 역시 다양한 소비자들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제품을 지속적으로 선보이고 있다"고 덧붙였다.
K-주류의 성장통, 흩어진 지원 체계
박 본부장은 우리 술 산업이 한 단계 더 성장하기 위해서는 분산된 지원 체계를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진단했다.
"주류 관련 협회와 단체가 굉장히 많고 정부 부처도 각각 역할을 나눠 담당하고 있다 보니 집중력이 떨어지는 측면이 있습니다. 수출은 수출 관련 기관이, 원료와 농업 분야는 농림축산식품부가 맡는 식으로 기능이 나뉘어 있지만 이를 종합적으로 이끌어갈 구심점은 다소 부족한 상황입니다.
막걸리협회나 우리술 관련 단체 등 다양한 조직이 존재하지만 각자의 이해관계가 다르다 보니 목소리를 하나로 내기가 쉽지 않아요. 정부와 업계를 아우르며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는 중심축이 마련된다면 산업 육성과 해외 진출 전략도 보다 체계적으로 추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우리 술 산업이 더 성장하려면 정책과 지원 역량을 효율적으로 모을 수 있는 체계가 필요하죠. 관련 기관과 단체들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움직일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K-팝처럼, 우리 술도 하나의 문화가 돼야
국순당의 전통주 해외 수출은 1987년 '생쌀발효 동동주'를 미국 교민 사회에 선보이며 시작됐다. 이후 1993년 국내 최초 캔막걸리 '바이오탁'을 개발하며 본격적인 막걸리 수출에 나섰다.
현재 국순당은 60여 개국에 제품을 수출하며 5년 연속 수출액 100억원을 돌파했지만, 박 본부장은 우리 술의 세계화는 여전히 진행형이라고 말했다.
“술만으로 알리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결국 K팝, 음식, 문화 콘텐츠와 함께 움직여야 지속 성장할 수 있다고 봅니다. 또 수출을 확대하려면 무엇보다 품질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100점짜리 술을 보냈는데 현지에 도착했을 때 맛이 떨어지면 안 되죠. 그래서 유통 과정에서 변질을 최소화할 수 있는 기술적인 보완이 계속 필요하다고 봅니다.”
또 하나는 표준화와 등급화 체계다. 박 본부장은 와인이나 맥주를 보면 품질 기준이나 카테고리가 비교적 잘 정립돼 있는 반면, 우리 술은 아직 발전시켜 나가야 할 부분이 많다고 전했다.
“물론 우리 술의 가장 큰 매력은 다양성입니다. 쌀막걸리뿐 아니라 옥수수 막걸리, 감자 막걸리 등 원료와 제조 방식이 매우 다양합니다. 다만 이런 다양성을 유지하면서도 소비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일정한 기준과 분류 체계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무엇보다 해외 시장에서는 '한국 술' 자체보다는 개별 기업의 브랜드가 중심이 돼 알려지는 경우가 많다.
“사케를 떠올리면 특정 브랜드보다 하나의 주종으로 먼저 인식하듯이, 우리 술도 장기적으로는 개별 브랜드를 넘어 하나의 문화와 카테고리로 자리 잡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K-팝과 K-푸드가 세계인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었듯, 우리 술 역시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기 위한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전통과 기술 사이에서 답을 찾아온 국순당의 실험은 오늘도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