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스케치] 행정의 심장에서 도민의 품으로… 청주 '그림책정원 1937'로 피어나다

- 1937년 지어진 근대 문화유산, 도민 곁의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 - 옛 도청의 목조 트러스와 흙벽 보존, '날 것'이 품은 시간의 미학 - 정승각 그림책 원화전부터 하늘정원까지, 세대 아우르는 문화 쉼터

2026-06-24     조용식 기자

[파이낸셜리뷰=조용식 기자] 전쟁의 벙커부터 낡은 관공서까지, 쓰임을 다해 굳게 닫혀 있던 전국의 공간들이 어둠을 걷어내고 시민을 위한 문화 예술 공간으로 새 옷을 갈아입고 있다. 본지는 청주 당산 벙커에 이어 두 번째 목적지로, 오랜 시간 충북 행정의 중심이었던 옛 충북도청 본관이 근대 건축의 원형을 품은 채 세대 간 소통의 문화 공간으로 화려하게 부활한 청주 '그림책정원 1937'을 심층 취재했다.

'날 것의 발견', 건축물 자체가 거대한 예술 작품이 되다

갈색 스크래치 타일이 멋스럽게 입혀진 단정한 좌우 대칭의 건물. 중앙 현관 위로 화려하게 피어난 꽃나무 조형물과 붉은 벽돌 사이로 1937년이라는 숫자가 선명하다.

1937년 건립되어 무려 89년이라는 기나긴 시간 동안 충청북도 행정의 심장부 역할을 해왔던 옛 충북도청 본관이 2026년을 맞아 '그림책정원 1937'이라는 따뜻한 이름과 함께 완벽한 열린 문화 공간으로 도민의 품에 돌아왔다. 권위적이고 딱딱했던 옛 관청의 낡은 철문은 활짝 열렸고, 서류 결재가 오가던 차가운 복도는 이제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그림책의 낭만이 흐르는 따뜻한 정원으로 환골탈태했다.

건물 내부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시선을 압도하는 것은 근대 건축물이 품고 있는 '날 것의 미학'이다. 공간 재생을 기획하며 기존의 낡은 천장재를 모두 뜯어내자, 1930년대 지어질 당시 건물을 든든하게 받치고 있던 거대한 '목조 트러스(나무 뼈대)'가 웅장한 자태를 드러냈다.

복합 문화 강연장과 복도 천장을 가로지르는 이 굵직한 나무 뼈대들은 그 자체로 훌륭한 건축적 오브제가 되었다. 오래된 나무의 거친 질감 사이로 현대적인 레일 조명이 세련되게 스며들며, 과거와 현재가 한 공간에서 교차하는 경이로운 시각적 경험을 선사한다.

시간의 흔적을 대하는 세심한 배려는 벽면 곳곳에서도 묻어난다. 붉은 벽돌을 그대로 노출시켜 빈티지한 매력을 살린 긴 복도, 그리고 옛날식 나무 흙벽 구조가 드러난 허름한 벽면 일부를 투명한 유리로 덮어 영구히 보존한 전시 방식은 압권이다. 건물이 지나온 굴곡진 역사의 생채기를 무리하게 감추거나 덧칠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날 것'을 도민과 공유하려는 진정성이 돋보인다.

'강아지똥'과 '황소 아저씨', 세대를 잇는 그림책의 위로

도청의 묵직한 사무실들은 이제 동심과 예술이 살아 숨 쉬는 다채로운 전시실로 변모했다. 개관 기념으로 열린 기획전 <그림책에 담긴 삶 : 정승각 그림책 원화전>은 공간에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고 있다.

전시실에서는 한국 아동문학의 거장 故 권정생 작가와 함께 호흡을 맞춘 정승각 작가의 대표작들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130만 부 이상 판매되며 국민적 사랑을 받은 『강아지똥』을 비롯해, 처지가 다른 이들의 따뜻한 연대를 그린 『황소 아저씨』, 그리고 강렬하고 풍성한 색채로 전통의 멋을 살린 『금강산 호랑이』의 원화들이 정성스럽게 전시되어 있다.

유리 진열장 너머로 빛바랜 스케치 노트와 붓 터치의 질감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원화를 들여다보고, 도슨트의 깊이 있는 설명을 듣다 보면 어른과 아이 할 것 없이 그림책이 건네는 깊은 위로에 빠져들게 된다. 이 밖에도 정교하고 아름다운 입체 조형의 세계를 보여주는 <엘레나 셀레나 팝업북전 : 종이 위에 펼쳐진 이야기>와 1980년대부터 이어진 <함께 그려 내는 벽화 이야기>아카이브 전시는 공간을 찾는 이들에게 풍성한 시각적 즐거움을 제공한다.

단순한 관람을 넘어 도민 누구나 머물고 휴식할 수 있는 편의 공간 역시 훌륭하게 조성되어 있다. 열람실 중심에는 공간의 동선을 부드럽게 이어주는 아늑한 곡선형 원목 서가가 자리 잡고 있다. 서가에는 '이달의 추천 그림책'부터 세계 유수의 수상작들까지 빼곡히 꽂혀 있어 자유롭게 책을 꺼내 읽을 수 있다. 붉은 벽돌벽을 따라 길게 뻗은 복도 곳곳에는 아담한 원목 의자와 책 거치대가 마련되어 있어, 창가로 스며드는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오롯이 나만의 독서 시간을 즐길 수 있다.

건물 밖으로 시선을 돌리면 또 다른 힐링 공간이 펼쳐진다. 옛 도청 옥상은 탁 트인 도심 풍경과 산세가 어우러진 '하늘정원'으로 꾸며졌다. 푸른 잔디와 아담한 파고라, 나무 테이블이 놓인 이곳은 바쁜 일상 속 숨통을 틔워주는 오아시스 같은 역할을 한다. 1층의 너른 잔디 광장 중앙에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와 함께 빛바랜 피아노, 붉은 스툴이 그림처럼 놓여 있어 공간을 찾는 이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완벽한 포토존이자 휴식처가 되고 있다.

닫힌 행정 공간에서 우리 모두의 문화 정원으로

1937년에 세워져 2003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기까지, 충북의 근현대사를 묵묵히 지켜온 이 붉은 벽돌 건물은 이제 딱딱한 권위를 완전히 내려놓았다. 옛 건축물이 가진 고유의 매력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현대적인 콘텐츠를 절묘하게 융합한 '그림책정원 1937'의 성공적인 변신은, 전국 지자체들이 안고 있는 유휴 공간 및 근대 문화유산 재생 문제에 훌륭한 해답을 제시한다.

지하의 어두운 '당산 생각의 벙커'가 현대인의 억눌린 감정을 해방시키는 짜릿한 카타르시스의 장이라면, 지상의 밝은 '그림책정원 1937'은 세대를 초월한 따뜻한 위로와 휴식을 건네는 안식처다. 단절된 공간에 예술과 생명력을 불어넣는 훌륭한 공간 재생의 마법이 청주 원도심을 눈부시게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