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호 칼럼] 경자유전의 정신은 지키되 농지제도는 현실에 맞춰야

2026-09-07     임영호

[파이낸셜리뷰] 농지는 농업의 가장 기본적인 생산수단이자 후대에 물려줄 소중한 자산입니다. 그래서 헌법은 ‘농사짓는 사람이 농지를 소유해야 한다’는 경자유전의 원칙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원칙이 만들어진 역사적 배경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농지개혁 이전 우리 농촌에서는 소수의 대지주가 넓은 농지를 소유하고 다수의 농민은 남의 땅을 빌려 농사짓는 소작제도가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농민이 씨를 뿌리고 땀을 흘려 농사를 지어도 수확물의 상당 부분을 소작료로 지주에게 내야 했습니다. 소작권도 안정적으로 보장되지 않아 지주의 뜻에 따라 하루아침에 농사지을 땅을 잃기도 했습니다.

땅을 가진 사람은 농사를 짓지 않고, 농사짓는 사람은 땅을 갖지 못하는 구조였습니다. 농민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어려웠고 농촌의 빈부격차와 지주·소작인 사이의 갈등도 깊어졌습니다. 해방 이후 농지개혁을 실시하고 경자유전의 원칙을 세운 것은 이러한 대지주제와 소작제도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70여년이 지난 오늘날 농촌의 모습은 크게 달라졌습니다. 농업인의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상속농지가 늘어나면서 농지를 소유한 사람과 실제 농사짓는 사람이 다른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청년농과 전업농이 농업 규모를 확대하려면 다른 사람이 소유한 농지를 빌릴 수밖에 없습니다. 임대농업은 이제 과거 대지주 밑에서 이루어졌던 소작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농업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현실적인 수단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현행 제도는 여전히 자경 여부를 중심으로 농지 이용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농지 전수조사도 이러한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채 불법 임대차를 가려내는 데 치우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조사를 두려워한 농지 소유자가 임대차계약을 해지하거나 농지를 회수하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고령농에게 농지 임대료는 노후생활을 지탱하는 소득입니다. 청년농과 전업농에게 임차농지는 농업을 계속하고 규모를 키우는 기반입니다. 불법 임대차를 바로잡으려다 정작 아무 잘못 없이 농사짓던 임차농이 농지에서 쫓겨난다면 농지 전수조사의 목적을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농지가격 하락에 따른 지역농협의 부담도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임대가 막힌 농지가 한꺼번에 매물로 나오면 농지 거래가 위축되고 담보가치가 떨어질 수 있습니다.

이는 농지를 담보로 대출받은 농업인뿐 아니라 지역농협의 여신 건전성에도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장기간 토양을 관리해야 하는 친환경농가도 임차농지를 갑자기 잃으면 그동안 쌓아온 영농 기반이 흔들리게 됩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지정책의 중심을 ‘경자유전’에서 ‘경자경영’으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실제 농업경영의 주체와 책임을 중심으로 농지의 소유·이용·지원제도를 다시 설계하자는 것입니다. 그 방향에는 공감할 만한 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경자유전의 원칙을 폐기하거나 농지 소유와 임대차를 전면 자유화하자는 뜻으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과거와는 다른 형태의 대지주가 등장하고, 자본을 가진 비농업인이 농지를 사들여 임대료를 받는 새로운 소작제도가 생길 수 있습니다. 농지가 다시 투기의 대상이 되고 실제 농업인은 높은 임차료에 시달릴 위험도 있습니다.

헌법도 경자유전을 원칙으로 삼으면서 농업생산성 향상과 농지의 합리적인 이용을 위한 임대차와 위탁경영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경자유전과 경자경영은 반드시 서로 충돌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경자유전의 정신은 지키면서도 실제 농업경영자를 중심으로 농지 이용제도를 현실에 맞게 고칠 수 있습니다.

농지 임대차를 폭넓게 허용하되 반드시 서면으로 계약하고 관할 행정기관에 신고하도록 해야 합니다. 임차 기간도 안정적으로 보장해 임차농이 안심하고 농사에 투자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실제 경작자에게 직불금과 각종 농업 지원이 돌아가도록 농지대장과 농업경영체 정보도 정확히 연결해야 합니다.

동시에 비농업인의 농지 소유에는 일정한 상한을 두고, 투기 목적의 농지 취득과 위장 임대차는 더욱 엄격하게 막아야 합니다. 과거 대지주제와 같은 농지 집중이 다시 나타나지 않도록 장치를 마련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농지 전수조사는 처벌을 위한 조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농촌 현장에서 관행적으로 이루어진 임대차를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이고 농지 소유자와 실제 경작자를 정확히 파악하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조사 과정에서 확인된 임대차는 일률적으로 계약을 해지하게 할 것이 아니라 일정한 유예기간을 두고 합법적이고 투명한 계약으로 전환하도록 해야 합니다.

과거의 경자유전은 대지주의 횡포로부터 소작농을 보호하기 위한 원칙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 정신은 유효합니다. 다만 지금 보호해야 할 사람은 농지를 빌려 실제로 농사짓는 청년농과 전업농입니다.

농지정책의 목적은 소유자와 임차인을 갈라놓는 데 있지 않습니다. 농지가 투기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지키면서 실제 농사짓는 사람이 안정적으로 이용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대지주와 소작제도의 부활은 막되, 현실적으로 필요한 농지 임대차는 양성화해야 합니다. 그것이 경자유전의 역사적 정신을 오늘의 농촌에서 제대로 살리는 길입니다.

임영호 약력

現) 동대전 농협 조합장

前)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