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의 역사] 세실 로즈, 성공 스토리의 오해

2026-10-23     김진혁
사진=픽사베이

“일찍이 자신의 가난함을 원망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貧而無怨難).”-『논어』‘헌문’

[파이낸셜리뷰] 가난하면서도 행복했던 사람은 야만이거나 성자일 뿐이다. 가난하면 형제도 남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혜의 첫 번째 덕목은 가난하지 않게 사는 것이다.

세실 로즈(1853~1902)는 영국에서 목사의 아들로 출생했으나 선천성 천식을 앓아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한 뒤 습기가 적은 남아프리카로 이주했다.

그는 열혈한 식민지주의자로서 다이아몬드 광산에서 많은 돈을 벌어 한 국가를 건설해 자기 이름을 따 로디지아라 짓고 로즈대학을 설립해 국가에 헌납했다. 면적이 39만㎢로 남한의 4배다. 지금은 그 나라를 짐바브웨라 부른다.

로즈는 활발한 아프리카 개척 사업으로 조국인 영국에 많은 식민지와 부를 안겨주었으며 영국 국내에서는 애국주의의 상징이었고 동시에 유명한 자선사업가로 당대 가장 존경받는 위인 중 하나였다.

죽을 때 유산 600만 파운드로 로즈장학재단을 만들어 영연방과 영연방이었던 국가 및 독일에서 뛰어난 젊은이를 전액 장학생으로 뽑아 옥스퍼드대학과 케임브리지대학에 유학시키라는 유언을 남기고 그 경영을 로스차일드 은행에 맡겼다. 세계 각지에 뽑혀 온 이 수재들을 로즈 스칼라라 불렀다.

지금은 다소 바뀌었지만 1950년대까지만 해도 로즈 스칼라에게는 두 가지의 관행이 있었다. 첫째로 그들은 의도적으로 박사학위를 신청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기들의 논문을 심사할 만한 실력의 심사위원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논문을 쓸 때 인용문이나 각주를 달지 않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논문이 창작이지 어느 선학의 글을 참고했거나 인용하지 않았다는 오만함을 그렇게 표현했다. 실제로 딘 러스크의 옥스퍼드대학 졸업 논문에는 각주나 인용문이 전혀 없음에도 최우수상을 받았다.

세실 로즈를 극찬하는 역사학자들은 그를 “남아프리카의 워싱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막스 베버는 세실 로즈가 현대사에서 가장 멋지게 살다 간 부호라고 칭송한다. 남아프리카 식민지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자타칭 남아프리카의 나폴레옹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로즈에게도 검은 역사도 있다. 로즈 스칼라들은 오만했고, 마치 자기들은 역사를 창조하고자 태어난 인물들처럼 행세함으로써 인연을 맺은 국가에 상처를 주었다. 그는 《신념의 고백》에서 말을 남겼다. “ 우리가 세계를 더 정복할수록 인류에게는 더욱 이득이다.”

대표적인 영국인 침략자이자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비윤리적인 면이 평가되어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는 제2차 보어 전쟁 때 4개월간 포위되었고 이로 인해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어 4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세일 로스는 사업을 통해 제국을 이룬 성공한 사람인가? 아니면 앵글로색슨 제국주의자인가?

“인생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채워지는 것이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무엇으로 채워가는 것이다”- 존 러스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