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책 안읽는 게으른 시대…이석연 전 법제처장이 꺼낸 ‘판단력 수업’
[인터뷰] 책 안읽는 게으른 시대…이석연 전 법제처장이 꺼낸 ‘판단력 수업’
  • 박영주 기자
  • 승인 2024.01.22 15: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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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검색이 곧 지식이 되는 게으른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책을 많이 읽고 생각하는 힘을 기른 사람들이 결국 인터넷 시대를 주도할 것이라고 본다. 

책을 통해 지식을 넓히고 지혜를 흡수한 사람들은 사고가 자유롭고 도전정신이 강하다. 책을 많이 읽었다고 100% 성공하진 않지만, 성공한 사람치고 책을 가까이 하지 않거나 덜 읽은 사람은 없다”

법무법인 서울의 대표변호사인 이석연 전 법제처장. /사진=박영주 기자
법무법인 서울의 대표변호사인 이석연 전 법제처장. /사진=박영주 기자

[파이낸셜리뷰=박영주 기자] 이석연 전 법제처장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미스터 쓴소리’, ‘원칙주의자’, ‘소신론자’ 등의 수식어를 거론한다. MB정부 시절 법제처장으로 있으면서 각종 소신발언들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뚝심 있는 발언을 이어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책’이 있었다. 

자타공인 책벌레이자 스스로를 ‘헌법주의자’로 부르는 이석연 전 법제처장은 “내 나름대로 책을 많이 읽었기 때문에 자신감이 있었으니까 그런 얘기를 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지금의 그를 만든 것은 8할이 책이었다고. 

지난 16일 법무법인 서울의 대표변호사 이석연 전 법제처장의 사무실을 찾았다. 들어서는 순간, 산더미 같이 쌓인 책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고 구수한 책 냄새가 은은하게 났다. 책이 주인인 공간에 이석연 전 처장이 세 들어 지낸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신주 사마천 사기, 문화재연감, 고구려왕조실록, 논어, 채근담, 노자 도덕경…

변호사 사무실이라면 법과 관련된 서적들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고전서적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도 눈길을 끌었다.

이석연 전 처장은 ‘책 권하는 사회 운동본부’ 상임대표를 맡으며 배우 안성기, 축구선수 출신의 홍명보 감독, 김종훈 한미글로벌 회장 등과 책을 통한 인연을 맺어 왔다. 그는 우리 사회 전반에 ‘책 읽는 풍토’가 뿌리내려야 한다며 대한민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병폐들도 결국에는 책을 읽지 않아 발생하는 탓이 크다고 지적했다. 

최근 언어학자 정계섭 교수와 『탁월한 선택을 위한 40가지 통찰 ‘판단력 수업’』 이라는 책을 펴낸 그는 올바른 의사결정을 방해하는 요소들과 함께 이른바 ‘한국병’으로 불리는 우리 사회의 오류와 편견 등을 꼬집었다. 이 역시도 책을 통해 습득한 지혜의 한 조각을 전하고자 집필했다는 설명이다.

지금은 ‘검색=지식’이 되는 게으른 시대
책을 읽고 생각하는 자가 SNS 시대 이끌어간다

“살았던 곳이 전라북도 정읍인데 중학교 때까지 수석만 하다가 졸업 전에 ‘검정고시’라는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돼서 고등학교를 안 갔다. 대신 검정고시를 봤다. 내심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가고 싶어서 독학으로 예비고사까지 합격해놓고는 금산사라는 절에 들어갔다. 그 암자에서 2년간 책만 읽었다. 

그때는 책이 아주 귀했을 때인데, 당시 500권 정도 세계 문학전집, 동서양 고전. 역사서 등을 읽었다. 그때 읽었던 괴테의 ‘파우스트’와 사마천의 ‘사기’는 지금도 나에게 감동을 주고 빠져들게 한다. 헤르만헤세의 ‘데미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젊었던 시절, 암자에 틀어박혀 책을 읽음으로써 얻은 지식과 지혜가 자양분이 됐다며 젊은 시절에 읽는 책의 영향력은 막강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만 70세를 코앞에 둔 지금 돌이켜보더라도 그때 책만 읽은 것에 대해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요즘 사람들은 지식의 조달을 주로 (인터넷‧유튜브 등) 검색을 통해 하는데, 검색이 곧 지식이 되는 지금은 ‘게으른 시대’라고 본다. 검색은 나의 지식이 아니다. 결국 SNS 시대를 이끌어가는 것은 책을 통해 지식을 쌓고 지혜를 흡수한 사람들이다.  

지금의 인터넷 세계를 만든 두 주역,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도 책의 중요성을 얘기했다. 빌 게이츠는 ‘오늘의 나를 만든 것은 미국이라는 나라도 아니고 하버드 대학도 아니고 내 어머니도 아니다. 내가 어렸을 때 다녔던 동네의 작은 도서관이었다’라는 이야기를 했고, 스티브 잡스는 ‘초년 대학시절에 고전 독서 프로그램을 통해 인문의 세계에 접촉했고 거기서 얻었던 그 지식이 바로 오늘의 애플을 만드는 원동력이었다’고 말했다. 

지금은 인터넷 시대지만, 나는 확신한다. 책을 많이 읽고 생각하는 힘을 기른 사람들이 인터넷 시대를 이끌어갈 것이다. 책을 많이 읽은 사람들은 사고가 자유스럽고, 하는 일에 자신감을 갖고 있다. 모험‧도전정신도 강하고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결국에는 올바른 길로 간다”

그는 젊은시절 심취했던 헤르만헤세의 ‘데미안’을 모티브로 그룹 BTS(방탄소년단)이 ‘피땀 눈물’이라는 앨범 냈다는 점을 언급하는가 하면, 세계적인 축구선수 손흥민의 아버지도 독서를 아주 많이 했다고 인터뷰에서 본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떤 분야에 성공한 사람은 기업인이건, 정치인이건, 연예인이건 책을 많이 본 사람들”이라 강조했다. 

“나 또한 10대의 젊은 시절, 데미안을 읽고 며칠간 잠을 못 이뤘다. 첫 구절 ‘나는 내 뜻대로 살고 싶었다. 그것이 그렇게 어려웠었던가’로 시작하는 데미안은 마음을 울렸다. 그리고 ‘알은 하나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는 문구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해서 100% 성공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어떤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 치고 책을 가까이 하지 않거나 또는 책을 덜 읽은 사람은 없다.” 

/사진=박영주 기자
/사진=박영주 기자

헌법학자와 언어학자가 펴낸 ‘판단력 수업’
만장일치의 함정, ‘그럴 줄 알았다’는 사후판단편향

책을 사랑하는 이석연 전 처장은 지금까지 20여권이 넘는 책을 써냈다.

스스로를 헌법주의자라고 부르는 이석연 처장은 ‘헌법소송의 이론과 실제’, ‘형법총론예해’, ‘헌법재판소 판례총람’ 등의 전문서적부터 ‘헌법은 살아있다’, ‘헌법 등대지기’ 같은 헌법 관련 서적을 수권 펴냈으며 동시에 사랑하는 독서를 핵심으로 한 ‘책 인생을 사로잡다’와 ‘책이라는 밥’ 등의 서적도 펴냈다.

사마천 사기에 심취한 만큼 ‘사마천 한국견문록’과 ‘사마천 사기 산책’ 등의 서적과 함께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본 ‘누구나 인생을 알지만 누구도 인생을 모른다’는 책도 써냈다. 

얼마 전인 지난해 12월 출간한 『탁월한 선택을 위한 40가지 통찰 ‘판단력 수업’』 이라는 책은 ‘헌법주의자’ 이석연 전 법제처장과 ‘언어논리학자’ 정계섭 교수가 함께 집필했다. 애석하게도 초고를 정리해가던 중 갑자기 정 교수가 고인이 됐다. 

이 전 처장은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카톡하고 그랬는데, 갑자기 돌아가셨다. 특별한 지병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믿기지가 않더라”라며 공동저자인 정계섭 교수가 책이 나오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처음에 나는 책 제목을 ‘편향과 오류 벗어나기’로 붙이려 했다. 그러면서 책 2장의 부제에도 있지만 ‘악마의 변호사는 왜 필요한가’에 대한 제목도 생각했었다. 

탈무드에 보면 만장일치로 결정된 것은 무효라는 이야기가 있다. 재판이 됐든 의사결정이 됐든 반대 입장을 펴는 사람은 설사 유죄라는 확신이 들어도 끝까지 무죄라고 주장해야 한다. 그래야만 거기서 새로운 증거가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황 선출에서도 반드시 악마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지 않나. 

이를 기업 등의 조직에 적용해본다면 ‘전문가의 함정’으로 이야기할 수 있겠다. 소수의 전문가에게 일을 맡기면 엉뚱한 결정이 나오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함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역할을 하는 악마의 변호사, 반대 입장을 취하면서 대안을 모색하는 선의의 비판자가 필요한 이유다.”

이석연 전 처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당시 헌법재판소에서 만장일치 의견이 나온 것 뿐만 아니라 대법원 전원 합의체도 전부 재판관 전원일치로 나온다며 “역사적인 판단이 남을 재판들에서 반대 의견이 없다는 점은 이해할 수 없다”고 꼬집었다. 

“우리나라 국무회의도 2년 반 동안 참석해 봐서 알겠지만 반대가 없다. 그냥 만장일치로 간다. 거기서 나는 몇번 얘기했다가 찍히기도 했지만 우리나라 회의는 특히 위로 갈수록 만장일치 시스템이다. 이렇게 되면 확증편향이 들어가기 쉽고 오류에 빠지게 된다.” 

‘그럴 줄 알았다’는 말로 주로 대변되는 ‘사후판단편향’에 대한 설명도 이어졌다. 이 역시 신간 판단력 수업에 담겨 있는 내용이다. 

“어떤 일이 발생하고 나면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나와서 ‘예견된 인재, 막을 수 있었던 사고였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지 않나. 사후에, 그러니까 어떤 일이 발생한 후에 마치 그 사건을 진작부터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처럼 말하는 것을 사후판단편향이라 한다. 

사후판단편향은 자기가 훌륭한 예언자라고 믿게 만들기 때문에 위험하다. 큰 실수는 전문가의 전매특허다. 그래서 나는 기업들에게도 전문가들을 너무 믿지 말라고 말한다. 조직에서 어떤 의사결정을 할 때는 전문가 뿐만 아니라 비전문가들 까지도 참여해 다양한 의견을 청취해야 한다.”

총 210 페이지의 신간 ‘판단력 수업’에는 다양한 책의 구절과 실제 사례, 수식을 통한 논리체계 등이 일목요연하게 담겨 있다. 주석이 상세하게 달려 있어 쉽게 읽히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끔 도와준다는 측면에서 판단력 수업이라는 제목과도 일맥상통한다. 

/사진=박영주 기자
탁월한 선택을 위한 40가지 통찰 '판단력 수업' 책 표지(왼쪽)와 공동저자 중 한사람인 이석연 전 법제처장. /사진=박영주 기자

‘찍을 사람 없다’도 의견이다…결선투표가 필요한 이유
고질적인 ‘한국병’…내로남불‧가짜뉴스‧기회비용의 무시

이날 인터뷰에서 이석연 전 처장은 우리 사회 곳곳에 뿌리 내리고 있는 고질적인 ‘한국병’이 있다며 ▲내로남불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혼동 ▲가짜뉴스 ▲기회비용의 무시 등을 강조했다.  

우선 자기중심적 사고라 할 수 있는 ‘내로남불’과 관련해 이 전 처장은 “특정 행동의 원인을 추출하는 것을 ‘귀인’이라 하는데, 여기에는 상황적 귀인과 기질적 귀인 두 가지가 있다. 내로남불은 내가 하는 잘못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벌어졌다는 식이고, 상대방의 잘못은 기질적인 것이라 말한다. 자기가 속한 조직에 이것이 적용되면 진영논리로 나타난다. 우리와 다른 견해나 관점 가진 쪽은 글러먹었다고 생각하지 않나”라고 말했다.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혼동하는 것에 대해서도 그는 “다양한 의견이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성립하는 것”이라며 “나 스스로도 시민운동을 많이 했지만 좌파척결운동? 이런 문구는 말도 안되는 것이다. 보수든 진보든 한쪽만 있어서는 완벽한 이념이라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다양성에 대한 고찰이 빠져있다는 것이다. 

‘가짜뉴스’와 관련해서는 “우리나라 갈등 비용만 몇십조에 달한다. 국회의원들이 면책특권을 악용해 교묘한 가짜뉴스를 퍼트리는 것에 대해서는 처벌이 필요하다”며 “독일 헌법은 명백한 허위사실로 밝혀졌을 경우 처벌하고 면책특권에 포함하지 않도록 돼있다. 아니면 말고 식의 행태는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끝으로 그는 ‘기회비용에 대한 무시’로 인해 천문학적인 비용이 허비된다며 “결정에 따른 차선책의 가치를 판단하지 않고, 전 정권을 부정하는 과정에서 아무것도 안 배우려는 행태들이 많은 것들을 놓치게 만든다. 다이아몬드 광산에서 돌멩이만 줍고 있는 격”이라 지적했다.

이 전 처장은 “다수결 민주주의가 과연 만능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든다. 이를 테면 과반을 확보하지 못한 결선투표제를 도입하는 것도 방법일 수 있다”며 새로운 투표 방식을 제안하기도 했다.

일례로 ‘찍을 사람이 없다’는 의견도 수용할 수 있도록, 투표용지에 ‘찍을 사람 없음’ 칸을 만들어서 이것이 과반이 넘을 경우 재선거를 실시하되 먼저 나온 후보들은 배제하는 방식의 실험도 도입해볼만 하다는 것이다. 

이 전 처장은 “우리나라만큼 패자에 가혹한 나라가 없다. 성공하려면 실패담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데 성공담만 늘어놓지 않느냐”며 “기업에 있어서도 정부가 실패한 기업인들을 안아주고 규제나 잘못된 시선을 풀어주는 방식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파워포인트’ 버려라…자유로운 생각의 힘, 독서로 키워야

이석연 전 처장은 오늘 인터뷰를 통해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다며 “파워포인트를 버려라”고 주문했다.

이 전 처장은 “뉴욕타임즈가 2000년대 초 ‘우리의 적은 파워포인트(We have met the enemy and he is power point)’라는 이야기를 했고, 세계 최대의 전자상거래기업 아마존은 파워포인트 사용을 일체 금했다”며 “이는 확증 편향을 없애겠다는 것”이라 말했다. 

“파워포인트는 아주 복잡한 문제를 축소시키고, 대안이나 비판을 억제한다. 파워포인트에 너무 의지해선 안 된다. 

나 스스로도 강의를 할 때 파워포인트를 안 쓴다. 누군가는 불성실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강의하는 입장에서는 잘 만든 파워포인트 하나만 있다면 마르고 닳도록 쓸 수 있기 때문에 새로운 이야기가 나올 수 없다. 자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파워포인트라는 정형화된 형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실제로 이날 인터뷰 역시도 사전에 질문지 하나 없이 진행됐다. 따로 질문지가 준비돼 있었냐는 물음에 ‘일부러 준비하지 않았다’고 답하자 오히려 좋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법제처장으로 일할 때 누가 그러더군요. 내가 미스터 쓴소리라고. 비판적인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고들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헌법주의자로서 책을 읽고 깨우친 대로, 소신대로 말했을 뿐이에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인데 똑같은 말만 하면 어떡합니까? 모쪼록 판단력 수업 책을 통해 사람들이 넓은 안목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참으로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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