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Hi스토리] 섬유 명가였던 태광그룹, 성장과 균열의 70년
[기업Hi스토리] 섬유 명가였던 태광그룹, 성장과 균열의 70년
  • 김희연 기자
  • 승인 2026.02.26 14: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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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수 리스크·금융 파동 거쳐… 지배구조 개선 시험대
제조 넘어 소비재로… 태광의 사업 재편 실험
태광그룹 CI./사진=태광그룹
태광그룹 CI./사진=태광그룹

[파이낸셜리뷰=김희연 기자] 섬유 산업으로 출발해 금융과 미디어로 외연을 넓혀온 태광그룹은 70여 년의 역사 속에서 성장과 논란을 함께 겪어온 중견 기업집단이다. 

제조업 기반으로 축적한 현금흐름을 토대로 사업을 다각화해 왔지만, 최근 재계 순위 하락과 주력 제조 계열사의 수익성 악화가 맞물리며 구조 전환의 시험대에 올랐다. 2018년 공정거래위원회 기준 재계 순위 36위까지 올랐던 태광은 지난해 59위로 내려앉았다.

글로벌 업황 둔화와 중국발 공급 과잉 여파로 석유화학·섬유 부문의 실적 부진이 장기화되는 가운데, 태광은 뷰티·제약·호텔 등 소비재 영역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재편하며 활로를 모색하고 있다.

섬유로 시작한 제조 기반

태광그룹의 뿌리는 1950년대 섬유 사업이다. 1950년 10월 공무원 출신 일주 이임용 창업주가 부산 수정동 동양실업에 지분을 투자한 것이 출발점이다. 1953년 동양실업을 인수했고, 1954년 ‘태광산업사’를 설립했다. 1961년 법인 전환 이후 섬유업을 중심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1970~80년대는 태광이 ‘섬유 명가’로 자리 잡은 시기다. 합성섬유와 석유화학으로 확장하며 수직계열화를 구축했다. 핵심 계열사 태광산업은 아크릴·폴리에스터·PTA(고순도테레프탈산) 등 석유화학 제품을 생산했고, 대한화섬은 합성섬유 소재 분야에서 입지를 다졌다. 

수출 중심 산업화 국면에서 생산 설비 확대와 규모의 경제 전략을 통해 외형을 키운 제조 부문은 금융과 미디어 부문 진출의 토대가 됐으며, 오랫동안 그룹의 현금 창출 기반이었다.

1990년대, 금융 복합기업으로의 변신

태광은 1973년 흥국생명을 인수하며 금융업에 발을 들였다. 1990년대는 제조 중심 그룹에서 금융 복합 기업으로 전환한 시기다. 현재 금융 계열사에는 흥국생명보험, 흥국화재해상보험, 고려저축은행, 흥국증권, 흥국자산운용 등이 포함된다. 

결과적으로 태광은 제조와 장기 자금 운용이 가능한 금융을 양대 축으로 하는 구조를 형성했다. 하지만 금융 축이 2020년대 들어 그룹 전체 리스크의 중심에 서게 된다.

미디어·방송·커머스로 외연 확대

태광은 제조와 금융을 양대 축으로 성장해 왔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는 미디어와 커머스 영역으로도 보폭을 넓혔다.

1997년 한국케이블TV안양방송을 설립하며 케이블 SO(종합유선방송사업자, System Operator) 사업에 진출한 것이 출발점이다. 당시 케이블TV 보급이 빠르게 확산되던 시기로, SO 설립과 인수를 통해 유료방송 시장에 발을 들였다.

2000년에는 케이블 PP(방송채널사용사업자, Program Provider) 사업에도 진출했다. 자체 채널 브랜드 ‘이채널(E채널)’을 출범시키며 콘텐츠 유통 사업을 본격화했고, 이후 여성·드라마·영화·예능 등 장르별 채널을 확대하며 방송 포트폴리오를 구축했다.

현재 미디어 부문은 티캐스트가 담당하고 있다. 티캐스트는 E채널을 비롯한 다수의 케이블 채널을 운영하며 콘텐츠 제작과 유통을 병행하고 있다. 다만 OTT 확산과 광고 시장 위축으로 케이블 채널 사업 전반이 성장 정체 국면에 접어들면서, 과거와 같은 외형 확장보다는 채널 효율화와 비용 관리에 무게를 두는 흐름이 감지된다.

티캐스트가 운영하는 예술영화관 씨네큐브는 2000년 12월 2일 서울 광화문 흥국생명 빌딩에 개관했다. 일반 상업 극장에서 쉽게 접하기 어려운 예술·독립 영화를 꾸준히 상영하며 상징적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커머스 부문에서는 티알엔이 T커머스 채널 ‘쇼핑엔티’를 운영하고 있다. 티알엔은 과거 북앤라이프 도서상품권 발행 사업을 영위했으나, 2020년 해당 사업을 분리 매각한 이후 홈쇼핑 운영에 집중하고 있다.

IPTV 기반 데이터홈쇼핑(T커머스)은 TV홈쇼핑보다 제작비 부담이 낮다는 장점이 있지만, 초기 고성장 기대와 달리 최근 몇 년간 산업 성장률이 둔화된 상황이다. IPTV 가입자 증가세가 정체되고, 소비자 구매 행태가 모바일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TV 기반 커머스의 입지가 약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스마트투데이 인수, 와인 유통사 메르뱅을 티알엔 산하로 이동시키는 등 미디어·유통 간 시너지 재정렬 움직임도 이어지고 있다.

2010년대, 총수 리스크와 경영 공백

이호진 전 태광 회장./사진=연합뉴스
이호진 전 태광 회장./사진=연합뉴스

2010년대 초반은 태광그룹 역사에서 가장 큰 분수령으로 꼽힌다. 2004년 이임용 창업주의 삼남 이호진이 회장에 취임하며 2세 경영이 본격화됐지만, 2011년 배임·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되면서 총수 리스크가 현실화됐다.

검찰은 계열사 자금을 사적으로 사용해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는 혐의를 적용했다. 이후 1·2심에서 실형이 선고됐고, 건강 문제 등을 이유로 보석과 재수감이 반복됐다. 재판은 수년간 이어졌으며, 이 기간 그룹은 사실상 총수 공백 상태에 놓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전략적 의사결정과 대규모 투자 역시 보수적으로 전환되면서 성장 동력은 둔화됐다.

사법 절차는 2018년 대법원 확정 판결로 마무리됐다. 이후 2021년 말 특별사면, 2023년 복권이 이뤄지면서 법적 제약은 해소됐다. 다만 복권 이후에도 이 전 회장의 공식 경영 행보는 제한적이었고, 시장에서는 총수 중심 경영 체제의 향방을 주시하는 분위기가 이어졌다.

이 전 회장의 복귀 가능성은 재계 안팎에서 꾸준히 제기돼 왔다. 특히 지난해 11월 이 전 회장이 그룹 산하 세화예술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선임되면서 경영 복귀 수순 아니냐는 관측이 다시 힘을 얻었다. 

2022년, 금융시장 흔든 콜옵션 번복

2022년 흥국생명의 신종자본증권 콜옵션 번복 사태는 태광 역사에서 또 하나의 분기점으로 평가된다.

흥국생명은 5년 전 발행한 외화 신종자본증권의 콜옵션(조기상환권)을 행사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신종자본증권은 보험사가 자본 확충을 위해 발행하는 영구채 성격의 채권으로, 법적으로 조기상환 의무는 없다. 그러나 국내 금융시장에서는 5년 시점에 콜옵션을 행사하는 것이 사실상 관행처럼 굳어져 있었다.

흥국생명의 미행사 결정이 알려지자 시장은 이를 ‘상환 여력 부족’의 신호로 받아들였고, 금융채 금리가 급등하며 크레딧 시장이 흔들렸다. 결국 흥국생명은 방침을 번복해 콜옵션을 행사했고, 이후 유상증자와 후순위채 발행 등을 통해 자본 확충에 나섰다.

대규모 공격적 M&A 나선 태광

태광산업 본사 전경./사진=태광산업
태광산업 본사 전경./사진=태광산업

업계에 따르면 태광산업은 범용 제품 중심의 석유화학·섬유 사업 부진으로 2022년 연결 기준 1045억원의 대규모 영업손실을 기록한 이후 2025년까지 4년 연속 적자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기준 4년간 누적 영업손실만 약 2700억원에 달한다. 글로벌 수요 둔화와 중국발 저가 공세가 겹치며 주력 사업의 수익성이 구조적으로 약화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 같은 실적 압박 속에서 태광은 사업 다각화를 시도하고 있다. 태광산업은 과거 SK브로드밴드 지분 매각으로 확보한 자금을 바탕으로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밝혔다. 이는 기존의 보수적 자본 운용 기조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자산 재배치 국면으로 전환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태광그룹은 올해 말까지 화장품 등 신사업에 1조 5000억원을 투자금 투입하겠다는 중장기 계획도 제시한 바 있다.

전통적으로 섬유·석유화학 중심의 B2B 구조에 머물렀던 태광은 화장품·제약·호텔 등 B2C 소비재와 금융·부동산 영역으로 사업 축을 확장하고 있다. 지난해 설립한 화장품 자회사 ‘SIL’을 중심으로 애경산업 인수 추진과 동성제약 인수 검토가 맞물리면서 화장품–제약으로 이어지는 소비재 라인업 구축을 구상 중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부동산 부문에서도 존재감을 확대하고 있다. 흥국리츠운용을 통한 코트야드 메리어트 서울 남대문 호텔 인수는 그룹 자산 재편 전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시장에서는 이를 남대문 일대 보유 자산과의 연계 전략, 이른바 ‘태광타운’ 구상과 연결해 해석하기도 한다.

한편 애경산업 인수전에 참여한 티투PE의 지분 구조를 두고 3세 경영 구도와 연결 짓는 시각도 있다. 공시 및 업계 자료에 따르면 티투PE는 티시스와 태광산업이 각각 41% 지분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호진 전 회장 자녀가 각각 9%씩 지분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제조 명가의 현재… 전환의 시험대

최근 태광은 지배구조를 티알엔과 티시스 두 축으로 정비하며 사업 체계를 재구성하고 있다. 지난해 6월 순환출자 구조를 해소하며 제조·콘텐츠·유통과 IT·금융을 분리해 관리하는 방식으로 책임 경영 체제를 명확히 하려는 시도다. 

그러나 시장의 시선은 여전히 엄격하다. 태광산업 2대 주주인 트러스톤자산운용은 수년간 거버넌스 개선을 요구해 왔으며, 최근에는 자진 상장폐지를 포함한 주주제안을 공식화했다. 태광산업이 시가총액 대비 2.4배 수준의 투자자산과 4배에 달하는 자본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주주가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며, 소수주주가 보유한 유통주식 23만주를 전량 매입해 자진 상장폐지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다.

트러스톤은 공개 주주서한을 통해 오는 3월 정기주주총회에 ‘소수주주 지분 전량 매입을 통한 자진 상장폐지’를 포함한 7개 안건을 상정했다고 밝히며 표 대결 가능성까지 열어둔 상태다.

이에 대해 태광산업은 기업가치를 높이는 해법은 자산 매각과 같은 단기 처방이 아닌 사업 구조 재편과 경쟁력 강화에 있다고 반박하고 있다. 중장기 성장 전략을 통해 기업가치를 제고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환경은 녹록지 않다. 주력 제조 사업의 업황 부진이 장기화하는 가운데, 공격적 투자 확대까지 겹치면서 그룹은 안정성과 확장성 사이에서 균형을 시험받는 상황이다.

결국 관건은 외형 확장이 아닌 실질적 수익 구조 개선인 만큼, 공격적 투자와 지배구조 정비가 성과로 이어질 수 있을지 시장의 검증이 본격화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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