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조선말 세도정치, 어떻게 탄생했나
[역사속 경제리뷰] 조선말 세도정치, 어떻게 탄생했나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2.05.25 11: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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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와 효명세자를 모티브로 한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
순조와 효명세자를 모티브로 한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조선시대 말 즉 19세기가 되면 세도정치에 의해 삼정의 문란이 일어난다. 삼정이란 전정, 군정, 환곡인데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전정은 ‘세금’이고, 군정은 ‘병역’이며, 환곡은 대출을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이 망가진 것이 바로 세도정치이다. 그 이전까지 즉 정조 때까지는 이것이 무너지지 않고 원칙을 지켰다. 이런 이유로 정조 때까지 민란이 발생하지 않았다.

민란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은 조세제도가 원칙대로 움직였기 때문에 백성 입장에서는 먹고 살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세기 세도정치가 발현되면서 삼정이 무너지게 됐다. 세도정치라는 것이 결국 특정인과 그 추종 세력, 즉 소수의 외척 가문들의 개입에 의해 이루어진 독과점적 정치 형태를 말한다.

특정 가문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면서 그에 따라 매관매직이 이뤄질 수밖에 없고, 매관매직을 한 사람들은 다시 백성들에게 고혈을 쥐어짤 수밖에 없었다.

정조까지만 해도 없었던 매관매직 현상이 순조 이후 발현되면서 삼정의 문란이 발생하게 됐고, 백성들은 항의 차원에서 민란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정조를 모티브로 한 드라마 이산
정조를 모티브로 한 드라마 이산

원맨쇼 정치

조선시대는 왕과 신하들이 서로 견제하는 것으로 정치를 했다. 왕은 신하를 견제하고 신하는 왕을 견제하는 것으로 부정부패가 사라지게 되고,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게 되는 것을 근본적인 이념으로 삼았다.

이에 의정부 삼사제도나 6조 직계 제도 등이 태종 때나 세종 때 혹은 세조 때 등으로 나타났다.

신하는 왕을 견제하고, 왕은 신하를 견제하는 것이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가능한 일이었다. 즉, 신하는 하나의 팀을 이뤄서 왕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선조 이후 붕당이라는 것이 나타났다. 붕당은 신하들이 끼리끼리 무리를 짓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념과 추구하는 것에 따라 다르게 편가르기를 하는 것인데 이것이 좋게 이야기를 하면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지만 나쁘게 이야기하면 ‘사회의 혼란상’이 될 수 있다.

어쨌든 조선중기까지 왕은 ‘신하’라는 집단 하나만 견제하면 됐지만 이제는 ‘붕당’이라는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게 됐다.

예컨대 노론을 부추겨서 소론을 압박하고, 소론을 부추겨서 노론을 압박하는 식이었다. 그것을 바탕으로 왕권 강화를 꾸려나갔다.

숙종 때는 3차례 환국을 거쳤고, 노론과 소론을 골고루 등용하면서 서로 견제하게 했다. 영조 역시 환국은 없었지만 탕평책을 통해 노론과 소론을 견제하게 하면서 왕권 강화의 틀을 마련했다.

정조도 비슷하지만 정조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측근 정치였다. 측근들을 통해 사색당파를 견제하는 식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홍국영’이다. 즉 정조 본인이 직접 나서서 붕당정치에 대한 견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위임자를 만들어 그 사람에게 모든 권한을 몰아주는 방식을 취했다.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오른팔을 중심으로 국정운영을 한 것이다. 홍국영이 몰락한 후 벽파와 시파로 나뉘게 됐고, 이를 정조는 개인적 역량으로 돌파구를 뚫으려고 했다. 그러다보니 시파가 득세하고 벽파는 몰락하는 상황에 봉착하게 됐다. 그나마 정조가 성인이었기 때문에 신하들을 견제할 수 있는 역량을 갖췄다.

견제장치의 실종

조선시대는 신하들이 부패하지 않게 하기 위해 나름대로 제도적 견제 장치가 마련됐다. 사헌부, 사간원 등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대간들이 붕당정치를 하면서 신하에 대한 비리 폭로나 정책 비판이 아니라 근거 없는 정치공세를 하게 됐다는 것이다. 각 당의 이익만 대변하는 꼴이 됐다.

그런데 숙종이 이를 절묘하게 이용하면서 세차례 환국을 만들었고, 그것을 통해 세력의 균형을 맞추려고 했다. 결국 이것은 신하의 견제 장치를 사실상 소멸시키는 결과가 됐다.

조선초기만 해도 왕을 감시하고, 신하를 견제하는 대간들의 역할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선조 이후 모든 권력은 비변사로 집중하게 됐다. 비변사라는 것이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국가안전보장회의 즉 NSC이다. 엄연히 의정부라는 국무회의가 있고, 영의정(국무총리), 좌의정(경제부총리), 우의정(사회부총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왕(대통령)이 비변사(NSC)를 통해 모든 국정을 처리하게 된 것이다.

아시다시피 오늘날 NSC도 철저하게 비공개를 원칙을 하지만 당시 비변사도 비슷했다. 그러다보니 견제장치가 아예 상실해버린 것이다.

철종을 모티브로 한 드라마 철인왕후
철종을 모티브로 한 드라마 철인왕후

정조 이후 유약한 왕들의 출현

정조 이전까지만 해도 이런 시스템 속에서 왕들의 개인적 역량 즉 원맨쇼를 통해 극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순조부터 이야기가 달라진다. 순조는 10세 때 즉위를 했다. 10세에 즉위를 했다는 것은 국정운영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5년간 수렴청정을 하게 됐는데 정순왕후 김씨다. 즉, 안동 김씨가 득세를 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순조가 병약한 임금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아들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겼는데 효명세자가 20세 나이로 요절했다. 결국 순조는 시름시름 앓다가 효명세자가 사망한지 4년만에 사망했다.

그 뒤를 이은 사람이 헌종인데 역시 나이가 8세이다. 당연히 수렴청정을 하게 됐고, 이번에는 신정왕후 조씨이다. 이른바 풍양 조씨가 득세를 하게 된 것이다. 헌종 역시 스스로 정치를 하려고 했지만 22세 나이로 사망을 한다.

그 이후 즉위한 왕이 이른바 강화도령인 철종이다. 19세까지 평민으로 살았다는 점에서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정치적 세력이 없었던 철종으로서는 꼭두각시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33세 나이로 사망을 했다.

그 뒤를 고종이 잇게 됐는데 역시 어린 나이이기 때문에 이번에는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거의 60년 가까이 이어지면서 관직은 돈으로 사는 즉 매관매직이 횡행했고, 그 매관매직이 이제는 당연시하는 풍조가 생기게 되면서 삼정의 문란이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고종 때에도 매관매직 등을 근절해야 하지만 흥선대원군도 그 이후 집권한 명성왕후도 매관매직을 근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향했다. 즉, 삼정의 문란은 구한말에도 계속 이어지면서 결국 백성들은 조선왕조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고, 그것이 동학농민운동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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