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9월 22일 국회오물투척 사건 발생
[역사속 오늘리뷰] 9월 22일 국회오물투척 사건 발생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2.09.22 09: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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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오물투척사건 당시 신문 기사 캡쳐
국회오물투척사건 당시 신문 기사 캡쳐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66년 9월 22일은 국회의원 김두한이 국회의사당에서 사카린 밀수 사건에 항의하기 위해 미리 준비한 오물(분뇨)을 정일권 국무총리, 장기영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김정렴 재무부 장관, 민복기 법무부 장관 등 국무위원들에게 투척한 사건이 발생한 날이다.

대한민국 역사사상 국회에서 오물투척사건이 발생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그리고 삼성의 후계 구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

박정희와 이병철이 짜고

삼성 황태자 이맹희(CJ 명예회장)씨는 1993년 ‘이맹희 회상록-묻어둔 이야기’에서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1965년 말 한국비료 건설과정에서 일본 미쓰이는 공장건설에 필요한 차관 4천200만달러를 기계류로 대신 공급하면서 삼성에 리베이트로 100만 달러를 줬다.

이병철 회장은 이 사실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알렸고, 박 대통령은 “여러 가지를 만족시키는 방향을 그 돈을 쓰자”고 말했다.

문제는 현찰로 100만달러를 일본에서 가져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삼성은 공장 건설용 장비를, 청와대는 정치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돈을 부풀리기 위해 밀수를 하자고 합의를 했고, 밀수현장은 이맹희 회장 자신이 지휘했고, 박정희 정권이 은밀히 도와줬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평소 들여오기 힘들었던 공작기계나 건설용 기계에서, 변기, 냉장고, 에어컨, 전화기, 스테인레스 판과 사카린 원료 등을 밀수했다.

밀수품을 시중에 내다팔아서 일부는 정치자금으로, 일부는 삼성의 내부자금으로 쓸 계획이었다.

국회오물투척사건 당시 신문 기사 캡쳐.
국회오물투척사건 당시 신문 기사 캡쳐.

경향신문 최초 보도

1966년 9월 15일 경향신문은 삼성그룹 계열사였던 한국비료가 일본에서 사카린의 원료를 밀수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그러자 세상이 발칵 뒤집어졌다. 국회에서는 본회의를 열어 ‘특정재벌 밀수 사건에 관한 빌문 안건’의 상정이 됐고, 통과가 됐다.

야당은 물론 여당인 민주공화당까지 사카린 밀수 사건에 대한 비판에 나서자 삼성 소유 언론들이 일제히 비호하기 시작했다.

똥이나 X먹어, 이 XX들아

국회 질의 마지막날인 9월 22일 당일 김두환은 국회 본회의 단상에 올랐다. 당시 김두한은 한국독립당 내란 음모 사건이라는 조작 사건에 휘말렸다가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에 한국독립당에서 무소속으로 당적이 없었다.

김두한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 등을 이야기했는데 실제 녹취록을 살펴보면 김두한은 상당한 달변가였다는 것이 드러난다.

장시간 연설 끝에 김두한은 “나는 이 사람을 내각으로 보지 않고 오늘날 3년 몇 개월 동안 부정과 불의를 하는 것을 합리화시켜버린 하나의 피고로서 오늘 이 시간부터 다루겠습니다. (장내 웃음소리) 이것이 도적질해 먹는 국민의 모든 재산을 도적질해서 합리화하고... 합리화시키는 이 내각을 규탄하는 국민의… 국민의 ‘사카린’이올시다. 그러니까 이 내각은 고루 고루 맛을 보여야 알지… 똥이나 X먹어 이 XX들아!”라면서 준비한 분뇨를 국무위원들에게 뿌렸다.

훗날 김두한의 수행비서였던 채원기는 김두한이 시켜서 탑골공원 변소에서 분뇨를 퍼왔다고 밝혔다. 또한 같은 수행비서였던 모세원은 다른 비서인 이세원이 탑골공원에서 퍼온 것이라고 증언했다. 다만 김두한은 첫 번째 공판 과정에서 비서 2명에게 지시해 자택 변소에서 퍼왔다고 증언했다.

오물이 국회 안에 뿌려지면서 국무위원들은 비명을 질렀고, 진동하는 냄새와 충격적인 광경 때문에 국회의원들은 혼비백산했다. 이날 오물을 뒤집어 쓴 사람은 국무위원들뿐만 아니라 국회 속기사들도 뒤집어 써야 했다.

국회오물투척사건을 다룬 SBS 야인시대 한 장면.
국회오물투척사건을 다룬 SBS 야인시대 한 장면.

내각총사퇴

이 사건으로 인해 정일권 총리를 비롯한 내각은 총사퇴를 해야 했다. 김두한은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서대문형무소에 구속 수감됐다. 1년 정도 수감이 되면서 모진 고문을 당했고, 이 때문에 몸이 망가졌고, 그로 인해 급사를 하게 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사건을 접한 박정희 대통령은 굳은 표정으로 한동안 말이 없었다고 한다. 특히 김두한이 국회에서 연설 할 때 박정희 대통령 대신 국무위원들에게 단죄한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에 대해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 후계구도 변화

국회오물투척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삼성의 후계는 이맹희 회장이었다. 이런 이유로 삼성 황태자라는 별명이 있었다.

내각총사퇴까지 하면서 사카린 밀수사건의 여론을 잠재우려고 했지만 여론은 쉽게 잠재워지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결국 이병철 당시 삼성 사장은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는 것과 2선으로 물러난다는 발표를 했다.

이에 1967년 10월 11일 이병철 사장은 한국비료 주식 51%를 국가에 헌납했다. 그리고 대검찰청은 9월 24일 이병철 사장의 차남인 이창희 한국비료 상무 등을 구속하고 10월 6일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이 사건을 매듭지었다.

1968년 이병철 사장이 경영 일선으로 복귀를 하자 이창희 상무는 그에 대한 불만을 품고 청와대에 이병철 사장의 비리를 폭로하는 투서를 전달하면서 왕자의 난이 발발했고, 이맹희 회장 역시 그에 연루됐다는 의혹 때문에 삼성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면서 후계구도가 이건희 회장으로 재편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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