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2월6일 미불 우호통상조약 체결
[역사속 오늘리뷰] 2월6일 미불 우호통상조약 체결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3.02.06 08: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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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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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778년 2월 6일은 미국과 프랑스가 우호통상조약을 체결한 날이다.

이날 조약 체결로 인해 미국은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독립전쟁에서 승리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상처 뿐인 영광을 안아야 했고, 결국 이것이 프랑스 대혁명으로 이어졌다.

미국은 이날 조약 체결로 명실상부하게 영국과 대등한 상황에서 전투를 할 수 있었고, 그것이 미국의 독립을 가져왔고, 오늘날 세계 최강대국이 될 수 있었다.

미국의 승리 가져온 조약

우호통상조약은 미국의 사실상 독립은 인정하는 동시에 양국 간의 상호 상업 및 항행권을 확립했다. 외국 시장에 대한 미국 접근을 제한한 영국 무역 및 항해법에 대한 도전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에 대한 프랑스의 지원을 보장하는 것이다. 이는 프랑스의 물질적, 재정적, 군사적 지원으로 인해 미국이 독립운동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해당 조약은 1942년 유엔 선언으로 공식적으로 군사동맹을 포기하면서 효력이 끝나게 됐다.

1776년 미국 대륙회의 의원들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하기 위해서는 외국 동맹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게 됐다.

이에 영국의 오랜 적이면서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많은 식민지 땅을 잃어버린 프랑스를 주목하게 됐다.

프랑스 역시 자신의 식민지 땅을 많이 빼앗아간 영국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초창기에는 통상 교역 수준의 조약을 체결할 것을 원했지만 미국 위원들은 추가 군사 원조를 집어넣게 됐다.

프랑스 역시 눈엣 가시와 같은 영국을 혼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면서 물질적 군사적 지원 등등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다.

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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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지원 받은 미국

해당 조약으로 인해 미국은 프랑스의 지원을 받게 됐다. 그것은 차관, 군사 장비, 해군, 기술 및 전략 지원, 인력 형태였다.

압도적인 물량 공세로 인해 영국은 그야말로 밀리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1만 2천명의 군인, 2만 2천명의 선원, 63척의 전함을 투입했다.

여기에 1783년 파리조약을 중재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영국으로서는 파리 조약에 서명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리게 됐다.

그러면서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신생국가가 됐다. 신생국가 였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점이 많았지만 프랑스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었다.

미국은 성장하지만 프랑스는

하지만 프랑스는 상황이 달랐다. 막대한 전쟁비용이 발생하고, 수많은 군인들이 미국 독립전쟁에서 사망을 했다.

당연히 프랑스 국민들로서는 왕실에 대한 불만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왕실에는 부채가 많았는데 그 부채를 갚아 나가기 위해 결국 세금을 더 징수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보니 프랑스 국민들은 왕실에 대한 불만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유로 결국 혁명의 불씨가 타오르기 시작했고, 이에 결국 프랑스 대혁명까지 발생했다. 이후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어 가면서 프랑스는 공화정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반면 미국은 별다른 전쟁도 없이 유럽을 상대로 무역을 해나가고, 영토를 확장하면서 점차 안정적인 기반으로 성장해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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