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4월 25일 갈리폴리 전투 개시
[역사속 오늘리뷰] 4월 25일 갈리폴리 전투 개시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3.04.25 09: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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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갈리폴리 한 장면.
영화 갈리폴리 한 장면.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15년 4월 25일은 갈리포리 전투가 발발한 날이다. 갈리폴리 전투는 영국군이 갈리폴리 반도에 상륙을 개시하면서 오스만 제국과 벌인 전투로 역사상 가장 최악의 전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실 갈리폴리 전투는 일어나지 않아도 됐을 전투였다. 왜냐하면 오스만제국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마자 중립국을 선언했다.

그러나 영국 윈스턴 처칠 수상이 악행을 저지르면서 오스만 제국이 어쩔 수 없이 독일제국의 손을 들어주게 되면서 전쟁터가 유럽 전역으로 확전되게 만들었다.

전함 1척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군비 경쟁에 돌입했다. 아르헨티나가 미국에 전함 2척을 발주하게 되면서 브라질은 영국에 새로운 군함을 발주하게 됐다.

그런데 1913년 브라질 정부가 갑작스럽게 디폴트 선언을 하면서 영국으로서는 난감한 상황이 됐다. 이때 오스만제국이 배를 인수하겠다고 나섰다. 당시 오스만제국은 그리스와 더불어 지중해 패권을 놓고 경쟁을 벌이고 있었고, 최신식 군함이 필요했다. 이에 영국에서 건조 중인 군함을 인수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알라가 준 축복’이라는 의미로 ‘술탄 오스만 1세호’라는 이름을 명명했고, 전함의 값을 모두 지불했다.

1914년 영국이 전함을 건조하자 오스만제국은 해군을 보내 전함을 인수하려고 했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됐다. 그리고 오스만제국은 중립을 선언했다.

영국은 독일과의 해상 전투를 치러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전함 1척이라고 더 필요했다. 이에 윈스턴 처칠은 국제법을 무시하고 술탄 오스만 1세호를 강제로 점거했고, 오스만제국 해군을 강제로 퇴함시켰다. 그리고 군함 이름은 ‘애진코트’로 변경한다.

오스만제국이 격분해서 영국에 항의를 했지만 처칠은 말도 안되는 저렴한 비용으로 임대를 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오스만제국은 더욱 분노를 했다.

당시 오스만제국에는 친영파와 친독파로 나뉘었는데 처칠이 군함을 강탈했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오스만제국은 친독파가 득세를 하게 됐다.

윈스턴 처칠.
윈스턴 처칠.

기름 부은 독일

여기에 오스만제국 이스탄불 항구에 독일 제국 해군 소속 전함 두척이 정박 중이었다. 독일은 오스만제국에 두 척의 독일 전함을 선물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전쟁에 휘말리기 싫었던 오스만 제국은 독일의 선물을 받는 것에 대해 주저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2척의 전함이 오스만 제국의 명령이 아닌 독일제국 명령에 따라 러시아 항구들을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러시아는 독일 전함이 아니라 오스만 전함으로 착각하고 오스만제국에게 선전포고를 하면서 오스만제국은 어쩔 수 없이 독일 동맹국으로 참전을 하게 된다.

지중해 제해권 확보 위해 오스만 공격

영국으로서는 지중해 제해권을 독일 연합군에게 빼앗긴 꼴이 됐다. 이것을 되찾기 위해서는 오스만제국 본토를 공격해야 하는 상황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갈리폴리 상륙작전이 펼쳐졌다. 그러나 결국 영국은 갈리폴리 전투에서 패배를 맛봐야 했다.

오스만제국은 시리아, 이라크, 팔레스타인, 트란스요르단 등 해외 영토를 모두 잃었지만 갈리폴리 전투에서 승리를 하면서 본토까지 점령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고, 오늘날 튀르키예의 영토를 그대로 보존할 수 있었다.

반면 윈스턴 처칠은 갈리폴리 전투가 흑역사로 기록되고 있다. 처칠을 비판할 때 다른 말도 할 필요 없이 ‘갈리폴리’라는 단어만 내뱉어도 쓴맛의 표정을 지었다고 할 정도이다.

또한 미국은 갈리폴리 전투를 교훈 삼아 상륙작전에 대한 개념을 다시 생각하게 됐고,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인천상륙작전 등을 만들어 냈다. 만약 갈리폴리 전투가 없었다면 미국도 갈리폴리 상륙작전과 같은 우를 범했을 수도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갈리폴리 전투로 인해 유럽의 경제는 물론 인구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만큼 갈리폴리 전투에서 사상자가 많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거꾸로 미국은 갈리폴리 전투 이후 급격한 경제적 성장을 이뤄냈고, 이는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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