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88서울올림픽
[역사속 경제리뷰] 88서울올림픽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3.06.22 10: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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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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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88서울올림픽은 1988년 서울에서 열린 올림픽을 의미한다. 단순히 서울에서 올림픽을 열었다는 것으로 역사적 기록을 남기기에는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엄청난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여파를 남겼기 때문이다.

만약 서울올림픽을 유치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산업화와 지금의 정치구조를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원래 전두환 신군부의 정권 정당성을 갖추기 위해 추진했던 올림픽이었지만 그것이 남긴 족적은 상당히 크다.

일본 인사 만난 전두환

올림픽은 박정희 정권 때부터 유치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10.26 사태가 발생하면서 최규하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은 올림픽 유치를 포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전두환 신군부가 일본의 한 인사를 만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당시 막후에서 한국과 일본의 우익세력을 연결하는 밀사 역할을 하던 세지마 류조 이토추 상사 부회장이 극비리에 내한했다.

그리고 전두환은 세지마 류조 이토추 상사 부회장을 만나는 자리에서 정치적 조언을 구했다. 이에 1964 도쿄 올림픽과 1970 오사카 엑스포를 예로 들면서 한국도 “이런 거대이벤트를 유치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다른데로 돌려보라”고 조했다. 전두환 신군부 세력은 이 조언을 받아들여서 최규하 정부의 유치포기 결정을 뒤집고 올림픽 유치에 정권의 사활을 걸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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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변화

우여곡절 끝에 1981년 9월 30일 서독의 바덴바덴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제84차 총회에서 일본의 나고야시를 52 대 27로 꺾고 결국 최종 개최지로 결정됐다.

올림픽이 유치되면서 사회적으로 상당한 변화가 불가피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야간통행금지 해제였다. 전두환 정권이 대한민국이 올림픽을 유치할 정도의 나라라는 것을 대외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는 ‘군부독재’ 이미지를 벗어던져야 했다. 이런 이유로 통행금지도 해제하는 등 박정희 시대 때의 이른바 긴급조치 9호가 대대적으로 해제되면서 박정희 시대 때 경직됐던 문화적인 부문에서 유연성을 보여줬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미국 중심의 문화교류를 벗어나 유럽과의 문화교류 등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유럽 문화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유입됐다.

또한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유치해야 한다면서 이때부터 시민의식이 한층 높아지게 됐다. 예컨대 길거리에 함부로 껌을 뱉지 않는다거나 한줄로 서기 혹은 새치기 근절 등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운동으로 번져 나갔다.

철거민 논란도

전두환 정권은 올림픽을 치르기 위해서 이른바 ‘달동네 환경정비’라는 명목으로 수십만에 가까운 주민을 거리로 내몰았다.

성화봉송 중 불량주택이 보이면 곤란하다면서 전국 성화봉송 루트 주변 경관에 보여지는 모든 판자집을 허물어버렸다.

또한 부랑자, 거지, 지적장애인이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무조건 잡아다가 보호시설에 수용시켰다. 이에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과 같은 인권 문제가 발생했다.

여기에 오늘날 잠실, 목동, 상계동 등이 재개발 됐고, 양천구와 노원구 역시 상당히 많은 변화를 보이게 됐다.

결국 철거민들이 폭발을 하기 시작하면서 1987년 서울지역철거민협회가 조직됐고,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북방외교 밑거름

전두환 정권은 88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서 동구권 국가 선수단의 참가를 가장 민감하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1984년 LA 올림픽의 경우 각각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에서 치러지게 되면서 이른바 반쪽 올림픽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런 이유로 전두환 정권은 88서울올림픽을 좌우가 함께 하는 그런 성공적인 올림픽으로 만들고 싶어 했고, 이에 소련은 물론 동구권 국가들과 손을 잡기 위한 노력을 했다. 그러면서 노태우 정권의 북방외교에 밑거름이 됐고, 오늘날 러시아와 동유럽 국가와의 정치적 경제적 외교의 밑거름이 됐다. 그러면서 수출의 다변화도 일어났다.

아울러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은 발전된 대한민국의 위상에 상당히 놀라면서 결국 소련과 동구권 국가의 붕괴에 일조했다는 평가도 있다.

군부독재 종식 신호탄 쏘아올려

88서울올림픽의 가장 큰 영향은 전두환 정권의 몰락이다. 원래 올림픽을 유치하려고 했던 것도 앞서 언급한대로 전두환의 장기집권을 염두에 뒀다. 하지만 민주화운동의 열기는 뜨거웠고, 그리고 직선제의 열망은 뜨거웠다.

6월 항쟁 당시 전두환은 원래 유혈 진압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유열 사태로 번지게 된다면 올림픽 개최 자체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전두환은 물러서게 됐고, 직선제를 수용해야만 했다.

전두환 정권은 올림픽 개최를 통해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했지만 결국 올림픽이 전두환 정권을 몰락하게 만들었다.

당시 바티칸 교황청은 전두환 정권이 유혈 진압을 한다면 IOC에 개최지 변경을 요구하려고 했다. 미국 역시 88서울올림픽에 동구권 국가 선수들이 참가한다는데 올림픽이 무산되면 자유진영의 번영을 선전하는 것이 무산되기 때문에 전두환 정권을 압박했다.

만약 올림픽이 개최되지 않았다면 전두환 정권은 6월 항쟁을 유혈로 진압하고, 지금까지 군부독재가 이어졌을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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