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①] 삼성의 가전맨, 이해민 회장을 만든 ‘부지런함’의 가치
[인터뷰①] 삼성의 가전맨, 이해민 회장을 만든 ‘부지런함’의 가치
  • 박영주 기자
  • 승인 2023.07.19 11: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파이낸셜리뷰=박영주 기자] “1등을 하려면 결국 제품의 심장은 내가 갖고 있어야 한다. 남의 것들을 가져다가 조립해서 만들면 당장은 성과가 나더라도 언젠가 1등은 할 수 없다. 그래서 냉장고의 심장, 컴프레서는 개발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지. 제품의 핵심인 심장을 남의 것을 가져다가 붙여서 만들면 신제품 개발할 때 바로바로 노출되지 않겠나. 그러면 안 된다. 그러니까 내가 만들어야한다.”

9일 오전 베스핀글로벌 본사에서 만난 이해민 회장의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냉장고는 우리 신체와 똑같다’며 주요 부품들과 작동원리를 심장·혈관·허파 등에 빗대 설명하는 그의 말에는 거침이 없었다. 삼성 이병철 회장, 이건희 회장 등과의 일화를 소개할 때는 마치 현장에 있는 것과 같은 생생함이 그대로 전해졌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역사와도 같았다.  

이해민 회장은 1942년생, 올해로 만 81세다. 삼성전자 가전부문 최고경영자(CEO)를 지냈던 그는 지금까지도 경영인으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팔순을 넘은 나이지만 이 회장은 여전히 매일같이 새벽 4시반경에 일어나 책을 읽고 가벼운 아침식사를 한 뒤, 2시간 가량 운동을 하고 회사로 출근한다. 대단하다는 말에 그는 “건강을 위해서 하는 것일 뿐”이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해민 회장은 자서전 「호모 딜리전트」를 써내면서 ‘일근천하무난사(一勤天下無難事, 한결같이 부지런하면 천하에 어려운 일은 없다)’라는 말을 강조한 바 있다.

현재까지도 이해민 회장은 몸소 부지런함을 실천해오고 있었다. 가전업계의 산 증인으로서 삼성전자 가전 부문 역사를 만들어냈다는 굵직한 족적 뿐만이 아니었다. 부지런함을 꾸준히 실천하는 ‘어른의 삶’은 그를 지탱하는 원동력이자, 젊은 사람들에게 그가 가르쳐줄 수 있는 산 교육이었다. 

이해민 베스핀글로벌 회장. /사진=박영주 기자
이해민 베스핀글로벌 회장. /사진=박영주 기자

이건희 회장과의 인연…끈질긴 러브콜에도 “5년만 기다려라”
컴프레서 기술제휴 위해 美회사 앞에 일주일간 텐트치고 숙식 
“1등을 하려면 결국 제품의 심장은 내가 갖고 있어야 한다”

이해민 회장은 서울대 사범대학 부속 중학교(서울사대부중)와 사대부고를 다니며 6년간 럭비선수로 뛰었다. 이 과정에서 동창이자 친구인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을 럭비팀으로 끌어들이기도 했다. 

인하대학교를 졸업한 이해민 회장은 당시 금성사(현 LG)에 입사했다. 그리고 그가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인 1969년도에 삼성전자가 삼성물산 전자부로 ‘가전’ 사업을 출범시켰다. 

“그때 이건희 회장이 ‘이제 우리도 전자전기 가전 사업을 하기로 돼있으니까 와서 같이 좀 도왔으면 좋겠다’라고 제의하더라. 그렇지만 ‘솔직히 얘기해서 나도 금성사에 들어간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알아야 도울거 아니냐. 안된다’고 거절했다. 우스갯소리지만 우리 이건희 회장이 ‘내가 오라는데도 안오고 하여튼 참 구씨 집안이 대단하긴 대단한가보다’라면서 아쉬워했다. 이건희 회장이 직접 이병철 회장 앞에 나를 데려가기도 했다.”

출발은 LG에서 시작했지만, 이해민 회장을 향한 이건희 회장의 러브콜은 매년 이어졌다고 한다. 그때마다 이해민 회장은 ‘5년은 기다려라. 한 회사에 들어가서 최소한 5년은 있어 봐야 돌아가는걸 알수 있을 것 아니냐’고 답했다. 

“5년이 지나니까 이건희 회장이 다시 전화가 와서는 ‘5년 되면 니 발로 걸어 들어온다고 했지 않느냐. 와라’고 하더라. 그때 내가 ‘야 그럼 그래. 이제 가겠다’라고 답했고 당시 동양방송 기술이사였던 강진구 이사를 만난 뒤에 74년도에 삼성으로 옮겼다”

삼성전자 기획부서 뉴프로젝트 담당으로 첫 출근을 했을 때를 떠올리며 이해민 회장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말을 반복했다. 

“당시 내가 과장보 직함을 달고 있었는데 직속상관은 아무도 없고 바로 대표이사였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던 상황에서부터 시작했다. 금성사는 회사 내 주물공장으로 정밀주조를 하고 있었는데 삼성전자는 그런 공장도 없었다. 가전사업을 해야 하는데 기획부터 정부 허가까지 안해본게 없었다”

이해민 회장의 업적 중 가장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냉장고의 핵심 부품 ‘컴프레서’ 국산화에 성공한 것이었다. 지금이야 기술의 발전으로 많은 부품들이 국산화에 성공한 상태지만 당시에는 부품 하나를 제조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미국과 일본 회사들의 문을 두드리고 또 두드려야만 했다. 그럼에도 돌아오는 것은 한국에서의 컴프레서 생산은 생각하지도 말라는 차가운 대답 뿐이었다. 
 
“1등을 하려면 결국 제품의 심장은 내가 갖고 있어야 한다. 남의 것들을 가져다가 조립해서 만들면 당장은 성과가 나더라도 언젠가 1등은 할 수 없다. 그래서 냉장고의 심장, 컴프레서는 개발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국으로 기술 제어선을 틀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당시에 아무것도 없었다. 편지라도 한번 보내면 한달이 지나서야 답변이 올까말까 하고 비행기를 타고가도 김포에서 하와이 거쳐서 들어가는데다가,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대한민국이 어딨는지도 모르겠고 삼성전자는 더더욱 모르니까 어떡하겠나. 직접 가서 부딪혀야지.”

당시 이해민 회장이 택했던 방법은 ‘무작정 가서 부딪히기’였다. 지금 시각으로 보면 너무 무대포 아닌가 생각될 수 있지만, 그것이야말로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었다. 

“그냥 월풀 회사 앞에 텐트를 하나 사다가 쳐놓고 그냥 아침·오전·오후로 두들겼다. 일주일이 지나니까 비서가 들어오라고 해서 들어가니까 앉으라는 말도 없고 ‘당신 얘기 들으려고 부른건 아니고, 내가 50대 중반까지 이 일을 해오면서 당신 같은 사람은 처음 본다. 그래서 불러봤다’고 하더라. 나는 그때 옳다구나 하고 계속해서 떠들었다. 지금도 우리가 영업을 할 때 어떤 방식으로든지 대화만 되면 된다고, 5분만 할애 받으면 90%는 성공이라고 한다. 대화만 되면 저 사람을 나한테 끌어들이면 된다. 그때 정말 신들린 것처럼 떠들어댔다. 한참 떠들다보니 그제야 앉으라고 하면서 좌석을 내주더라.”

다행히 이야기는 잘 풀렸다. 컴프레서 메이커 회사인 美 캘비네이터(kelvinator)를 소개받을 수 있었다. 기술제휴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됐지만 캘비네이터 사장은 50만대는 생산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쉽게도 당시 한국 냉장고 시장의 생산량은 연간 10만대가 고작이었다. 이 회장이 내린 전략은 50만대를 생산해서 일부는 삼성전자 냉장고를 만드는데 사용하고 나머지는 전부 수출하겠다는 방향이었다.  

“미국으로 출장갈 때 강진구 대표가 ‘기술제휴 못 잡아오면 들어올 생각도 하지 말라’고 했었는데, 새벽 1시에 당시 강 대표한테 전화를 하니까 자다깨서 전화를 받고는 ‘이게 (기술제휴가) 될 것 같다’고 자초지종을 말하니까 그냥 좋아하더라. 얼마나 좋았으면 ‘당신 고생했으니 뉴욕 가서 한 일주일 쉬다오라’고 하더라.”

그렇게 캘비네이터와 MOU를 체결하고 본격적인 컴프레서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사실 MOU가 됐다고 해도 모든게 잘 풀리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삼성전자 내에서는 ‘이해민이 회사를 말아먹으려고 한다’며 반발이 거셌고 막상 설계도면을 받아보니 메인 설비 리스트만 주고 세세한 부분은 알 수가 없었다. 

“카메라를 갖고 다니면서 공장에 들어가서 찍어갖고 나와서는 호텔에 가서 그걸로 열심히 스케치해서 한국에 보내면 한국에서 다시 도면을 만들고 제품을 만들어보고 그랬었다. 그게 쉽게 안 나오지. 하다보면 엉뚱한 제품이 나오고 그걸 또 고치고 고치고 해서 결과적으로 완성시켰다. 우리보다 훨씬 선배들도 다 그런 고생을 해서 (제품을) 만들었다. 이병철 회장님은 ‘이 자식들이 말야. 카피도 제대로 못하고’ 하시면서 역정을 내셨는데 참... 사실 카피도 쉽지가 않았다”

이해민 베스핀글로벌 회장. /사진=박영주 기자
이해민 베스핀글로벌 회장. /사진=박영주 기자

한번은 삼성전자 미국 제조법인(Samsung International In-corpration LTD. 이하 S.I.I) 설립초기 미국 진출 결정을 둘러싸고 이런 일도 있었다.

신세계·조선호텔 명예회장인 정재은 회장은 ‘미국 진출은 잘못됐다. 빨리 철수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이건희 회장은 ‘장기적 관점에서라도 미국 진출은 꼭 필요하니 지금 들어가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사위와 아들의 입장이 첨예하게 갈리자, 선대회장인 이병철 회장은 “두 사람이 서로 의견이 다르다. 도대체 누구 말이 맞는지 모르겠으니 현지 책임자인 이군(이해민 회장)이 대답해보라”고 공을 넘겼다.

당시 이해민 회장은 누구 편을 들기 어려워 참으로 곤혹스러운 상황이었다면서도, 당당하게 소신을 밝혔다고 회상했다. 

“그때 내가 ‘미국 뉴저지주 레지우드에 땅을 확보한 것은 선견지명입니다’ 하니까 어째서 그런가 물으셨다. 그때 내가 한말이 ‘지금 미국 경제가 어려워서 땅값이 아주 저렴한 시기에 이렇게 좋은 땅을 확보한 것은 잘한 일인 것 같습니다. 궁극적으로 세계 1등을 하려면 미국 시장은 빼놓고는 안 되지 않습니까. 향후에도 물류기지를 확보해야 하는데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했다”

“회장님이 계속 얘기해보라 하니까 내친 김에 멕시코로 공장을 이전할 계획이라는 부분도 설명 드렸지. 그때 당시에 내가 무슨 정보를 캐치했냐면 ‘마퀼라도라 비즈니스’라고 해서 미국과 멕시코 국경 인근에 트윈시티를 만들어서 거기 기업들을 이주시킨 다음에 멕시코 국경을 넘어오는 불법이민자들을 일하게끔 하려는게 있었다. 그게 내년부터 발효가 되는데 그때 멕시코 나라 자체가 재정적으로 형편없었던 시기여서 멕시코가 땅을 내놓으면 시티은행이 장기저리로 대지 대금을 상환 받는 조건이 합의 직전이었다. 우리로서는 그냥 거저 멕시코 공장 부지를 확보할 기회가 열린거지. 멕시코 티후아나에 엘푸로리도 땅 50만평을 나한테 달라 해서 그게 거의 성사가 될 정도로 진행되고 있었거든. 그걸 쫙 설명해드렸지.”

“그러니까 이병철 회장님이 ‘좋다. 바로 추진해라’ 하시길래 ‘지금 본사 사장님께 말씀드려서 품위 중입니다’하니까 ‘야 이놈아 지금 여기 회장이 와있고 사장이고 뭐고 다 와있는데 무슨 품위냐. 내가 바로 구두결제 해줄테니까 추진해라’ 하시더라. 그렇게 해서 곧바로 일을 추진할 수 있었다.”

해당 내용은 이해민 회장의 자서전 호모딜리전트 270p에도 실려 있다. 본사의 전권 위임 덕분에 S.I.I.를 근거로 티후아나에 SAMEX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 이 일화를 전하면서 이해민 회장은 “지금도 아무리 시대가 좋아져서 인터넷으로 정보를 찾아볼 수 있고 하지만 현장을 가봐야만 알수 있는 것들이 있다. 책상에 앉아만 있으면 안 된다. 부지런하게 다니면서 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청춘을 삼성전자에 바치며 누구보다 열심히 뛰었던 이해민 회장이었지만, 아쉽게도 건강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이 때문인지 지금도 이해민 회장은 매일 꾸준히 운동을 지속하고 있다. 

“사실 삼성전자에서 나올 때 사표를 쓰고 나왔다. 그게 2000년도인가 그럴건데, 내가 아주 팔다리가 완전히 마비됐었다. 1년을 재활치료를 해서 이렇게 움직일 수 있게 됐는데 삼성에 내가 적을 두고 있으면 정신적으로 머릿속에서 일이 떠나지를 않으니까 그냥 사표를 썼다. 그런데 계속 반려가 되더라.” 

“당시에 이건희가 회장이었던 시절인데, 건희한테 제발 사표를 수리해달라고 하니까 ‘야 인마. 사장들 안식년도 있고 많은데 일년 회복하고 도로 들어오면 되지 사표는 왜 내냐’ 이러더라. 내가 ‘나이도 나이고 내 병을 완벽하게 고치려면 내가 삼성을 지우지 않으면 안되겠다’ 해서 허락을 받았다.”

“그랬더니 또 인사 담당 부사장 녀석이 쫓아오더니 회장님 명이라면서 비상근 고문이니까 회사에 안 나와도 좋고 일 안해도 좋으니까 여기에 사인해 달라고 해서 사인했다. 자기들도 어쩔 수 없다면서. 그렇게 2010년까지 있었다. 이후에 아들 녀석이 사업을 크게 벌리는 바람에 이렇게 시작하게 된거지.”

/사진=박영주 기자.
이해민 베스핀글로벌 회장. /사진=박영주 기자

“부지런함만 있다면 모든 어려움 이겨낼 수 있다”
‘Learn, Do, Share’의 가치…배우고 실천하고 공유하라

지금 이해민 회장은 클라우드 관련 사업을 하는 ‘베스핀글로벌’의 회장직을 맡으며 신입직원들의 교육을 맡고 있다. 이 회장의 아들이자 베스핀글로벌 창업자인 이한주 대표가 시니어인 이 회장을 모시면서 조언을 계속해서 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들이 사업을 하는 것을 옆에서 보다보니 참 잘하더라. 나이 먹은 사람들은 저 젊은 놈들 저러다 큰일난다 떠들기만 하는데 그런 소리 하면 안 된다. 나도 처음에 여기 와서 보니까 대표가 있는데도 직원들이 쇼파에 누워있고 분위기가 적응이 안됐지만, 지금은 이 사람들이 하는대로 두면서 가르쳐줄 것은 가르쳐준다. 젊은 사람들이 고쳐야할 것들도 많지만 배울 것들도 많다. 나이가 들어도 계속해서 배워야 한다.”

현재 베스핀글로벌을 관통하는 회사 가치는 ‘런 두 셰어(Learn, Do, Share)’다. 배우고, 실천하고, 그리고 공유한다는 것이 골자다. 

이해민 회장 역시도 젊은 시절 미국과 일본의 회사를 두드리며 어렵게 배운 기술을 바탕으로 일을 하고, 시니어가 된 지금은 조직관리나 직원교육 등을 통해 자신의 노하우를 공유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실천하고 또다시 베풀고 있었다.

“젊은 사람들에게 도움 되는 말을 해주라면 ‘부지런하라’고 하고 싶어요. 부지런하면 안 되는 일이 없거든. 회사에서 보면 젊은 직원들이 얼마나 부지런한지 몰라요. 요즘은 또 옛날과 다르게 공부하기가 너무 좋은 세상이잖아”

이해민 회장은 자신의 자서전 ‘호모딜리전트’의 문구로 하고 싶은 말을 갈음했다.

“부지런함만 있다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 부지런할 수만 있다면 다른 것들이 부족하더라도 반드시 이루고자 하는 바를 향해 뚜벅뚜벅 나아갈 수 있다. 인생은 결과가 아닌 과정이며, 이 과정을 거쳐가는데 가장 중요한 부지런함을 죽는 날까지 이어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