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8월 29일 난징조약 체결
[역사속 오늘리뷰] 8월 29일 난징조약 체결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3.08.29 09: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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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조약 체결 당시 모습을 그린 그림.
난징조약 체결 당시 모습을 그린 그림.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842년 8월 29일은 제1차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가 승리한 영국과 불평등조약인 난징조약을 체결한 날이다.

18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가장 강력한 국가로 취급됐던 중국이 서양에 의해 최초로 무릎을 꿇은 사건이면서 중국의 근대화에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현대사에서도 가장 영향을 미쳤던 사건이기도 하다.

아울러 역사가들이 평가를 할 때 가장 추악한 조약이라는 평가를 내린다. 그 이유는 아편전쟁 때문이다.

1차 아편전쟁 발발 이유

1차 아편전쟁이 발발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역 불균형이다. 청나라는 엄청난 흑자를 거둔 반면 영국 특히 동인도 회사는 엄청난 적자에 시달려야 했다.

영국은 산업혁명을 기반으로 기계에서 뽑아낸 면직물을 청나라에 수출하면 엄청난 이익을 얻을 것이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청나라는 엄청난 인구를 기반으로 한 가내 수공업이 초기 산업혁명을 뛰어는 가격 경쟁력을 자랑했다.

즉, 영국의 기계에서 뽑아내는 면직물보다 청나라 백성들이 생산하는 면직물의 가격이 더 저렴했다. 따라서 청나라 시장에 풀린 영국산 면직물은 청나라 백성들에게 매력적인 상품이 아니었다.

반면 영국에서는 청나라에서 생산한 ‘차(茶)’가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일반 가정의 월수입 중 5%를 차 구매에 사용했을 정도이고, 중국 무역의 90%가 차였다. 이런 이유로 영국의 은(銀)이 중국으로 막대하게 유입됐다.

영국 동인도회사가 이 막대한 적자를 메꾸는 방법으로 인도 뱅골에서 생산하는 아편을 청나라에 수출하는 방법이었다.

청나라 내부에서 아편의 폐해가 심해지면서 청나라 조정은 임칙서를 파견해서 아편을 근절시키려고 했고, 이 과정에서 충돌이 빚어지면서 영국 정부는 결국 아편전쟁을 일으키게 됐다. 그리고 청나라가 패배하면서 난징조약을 체결했다.

동아시아 최초 굴욕외교

난징조약으로 동아시아 최초로 외세에 굴복해 무역항을 개항하게 됐다. 이는 청나라의 양무운동에 영향을 주게 됐고, 일본은 에도 막부가 미국에 굴복하면서 두 번째로 개항했고, 조선은 일본 제국에 굴복하면서 세 번째 개항을 하게 됐다.

두 번째(일본), 세 번째(조선)의 개항은 모두 난징조약을 그대로 답습했다. 즉, 난징조약을 표본으로 삼아 침략을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난징조약을 세계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서구 열강의 입장에서는 청나라도 ‘별거 아니다’는 인식을 갖게 만들었다.

이는 청나라의 대오각성을 하게 만들었고, 결국 중화민국이 탄생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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