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사할린
[역사속 경제리뷰] 사할린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4.01.16 13:1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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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18일 국내에 영주 귀국한 사할린 한인 1세들이 18일 오전 인천국제공항에서 사할린을 방문하기 위해 출국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2019년 6월 18일 국내에 영주 귀국한 사할린 한인 1세들이 18일 오전 인천국제공항에서 사할린을 방문하기 위해 출국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사할린 섬은 북태평양에 있는 러시아 연방의 섬이다. 면적은 7만 2492㎢로 남한 면적의 3/4에 달한다. 인구는 48만명인데 한국계가 3만명이다.

해당 지역은 근현대 이전까지만 해도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천연자원이 많이 매장된 곳이라는 것이 드러나면서 그에 따라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역사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섬

사할린은 역사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섬이었다. 중국에 당나라가 들어서자 유귀국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중국에서 지리적으로 너무 멀었기 때문에 외교 관계를 지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천연자원의 보고라는 것을 알았지만 당시에는 아무런 쓸모 없는 땅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에 그에 따라 중국에서도 별다른 관심을 두지 ㅇ낳았다.

몽골제국 역시 침공을 해서 복속을 했지만 정착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워낙 추운 곳이기 때문이다. 청나라 역시 군대를 보낸 후 자국 영토로 간주했지만 실질적 지배권을 확립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17세기 청나라의 관리가 소홀해지고, 러시아가 동북아시아로 남하를 하면서, 일본은 에도막부 시대에 북상을 하면서 사할린 남부와 북부를 중심으로 식민 개척이 이뤄졌다. 이것이 러일 양국의 사할린 영유권 주장의 근거가 됐다.

하지만 러시아나 일본에서 워낙 먼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지배를 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1806년 러시아의 통상요구를 에도 막부가 거부하면서 러시아 해군은 사할린 남부와 쿠릴 열도 등을 습격하면서 사할린을 러시아령으로 선언했다.

이에 이듬해인 1807년 에도 막부가 사할린과 쿠릴 열도를 일본령으로 선포하면서 러시아와 일본이 충돌하는 듯 했다.

다만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로 싸울 수도 없기 때문에 러일화친조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사할린에 대한 양국 경쟁은 지속되면서 공동 관할지가 됐다.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으로 인해 쿠릴 열도는 일본이 영유하고, 사할린 전역은 러시아 영토가 됐다. 하지만 1905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일본군이 사할린 섬을 단숨에 점령했고, 전후 체결된 포츠머스 강화조약에 의해 본래 일본의 영향권이던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 남부는 일본령으로 재편입됐다.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러시아 내전이 벌어지자 1925년까지 일본군은 사할린 전역을 지배했다. 하지만 소련이 불법점유라고 주장했고, 일본은 북사할린에서 스스로 철수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소련군이 사할린을 점령했다.

사할린 한인

사할린에는 한인이 3만명 정도 생활하고 있다. 그것은 일본에 의해 강제 이주 및 징용당한 조선인과 그의 후손이다.

만주나 연해주는 자발적인 이주가 있었다면 사할린은 강제 이주 성격이 강했다. 문제는 일본이 1945년 패망을 하면서 자국민들은 일본으로 송환을 했지만 한국인은 그대로 방치를 했으며, 결국 사할린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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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열 2024-01-31 15:50:58
기사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