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1월 18일 파리강화회의
[역사속 오늘리뷰] 1월 18일 파리강화회의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4.01.18 08: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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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강화회의
파리강화회의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19년 1월 18일은 파리강화회의가 열린 날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연합군이 동맹국과 관련해서 열린 회담이다.

주요 내용은 국제연맹 창립, 패전국 5개국과의 조약 체결, 오스만 제국 그리고 독일 제국의 해외 영토를 영국과 프랑스가 위임통치, 민족 경계를 반영한 국경 재수립 등이었다.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외쳤지만 민족자결주의는 연합국에 패배한 패전국 식민지에 대한 민족자결주의였을 뿐이지 다른 식민지 국가는 아니었다. 이런 이유로 파리강화회의에서 대한민국 독립을 요구했지만 철저하게 무시됐다. 그 이유는 일본이 연합국의 일원으로 승전국이 됐기 때문이다.

우리의 노력

1918년 8월 상하이 중심으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신한청년당을 결성했다. 이들은 영어에 능숙한 김규식을 입당시키면서 이사장으로 추대했으며 한국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키로 결정했다. 그와 더불어 국내에서는 3.1운동이 봉기됐다.

김규식은 1919년 3월 13일 프랑스 파리에 독착해 한국민대표관을 설치하고, 한국독립에 관한 청원서를 강화회의에 제출했다. 하지만 프랑스 당국은 김규식이 정당 대표 자격임을 문제삼아 ‘정부대표가 아니면 참여할 수 없다’며 김규식과 한국 대표단을 문전박대했다.

김규식은 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게 정부대표로서의 자격을 부여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그해 4월 11일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는 김규식을 '평화회의 대한민국위원 겸 파리위원'의 정위원으로, 이관용을 부위원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5월 10일 '한국독립 항고서(抗告書)'를 강화회의에 제출했다. 또한 대표단은 '한국독립과 평화'라는 책자를 비롯해 다수의 독립운동 홍보문서를 작성해 각국대표들 및 언론인들에게 배포해 한국인의 독립 열망을 전 세계에 널리 알렸다.

철저히 무시 당해

하지만 철저히 무시를 당했다. 그 이유는 일본제국주의가 연합국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제국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연합국의 일원이 됐다. 물론 제1차 세계대전에 직접적으로 참전하지 않았다.

주로 병참기지가 됐다. 이에 일본에서 생산한 물자가 유럽 전선에서 소비가 되면서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뤄냈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불경기를 맞이했다. 그것이 일본제국주의가 군국주의로 나아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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