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마산
[역사속 경제리뷰] 마산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4.01.22 13: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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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다음카카오 지도.
사진=다음카카오 지도.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마산은 현재 ‘창원시’에 편입된 도시이지만 과거 한때는 7대 도시라고 부를 정도로 엄청난 부를 축적한 도시였고,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도시였다.

삼국시대부터 엄청나게 큰 도시였다. 그것은 큰 항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왜구들의 노략지로 꼽히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는 어시장과 조운출항지로의 항구 기능을 가지게 됐다. 1910년 국권피탈이 이뤄지자 창원부는 마산부로 개칭됐다. 1914년 시가지를 부로, 외곽지역을 군으로 분리하는 도농분리 정채겡 따라 마산부의 영역을 개항장 일대로 축소시키고, 마산부의 나머지 영역을 창원군으로 분리시켰다.

원래부터 큰 항구

마산은 삼국시대부터 원래 큰 항구가 있었던 지역이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때는 조선과 일본이 오가는 사람들과 물자들이 북적이는 항구로 급부상했다.

무엇보다 김해평야에서 생산되는 쌀들이 집결하는 곳이기도 했다. 삼성그룹의 이병철 회장이 26세 당시 마산에 협동정미소를 차린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막대한 부를 얻었지만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비상조치가 내려졌고, 결국 이병철 회장은 정미소와 운수회사를 남에게 넘기면서 모든 부채를 청산해야 했다. 그렇게 빈털터리가 돼서 마산을 떠났지만 훗날 대구에서 재기해서 우리나라 굴지의 대기업이 됐다.

일제강점기 후기에 마산 인구는 5만 4천명 정도인데 이는 우리나라 7대 도시 안에 포함됐다. 그만큼 번성한 도시였다.

피난민 모여든 도시

마산은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피난민과 농촌에서 몰려든 사람 그리고 해외에서 귀국한 사람들로 붐볐다.

물론 부산항이라는 거대한 항구가 있었지만 사람들과 물자들이 여전히 마산항을 중심으로 오가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워낙 큰 도시가 됐고, 큰 도시가 됐다는 것은 그만큼 정치적으로 눈을 떴다는 것이고, 이것이 3.15 부정선거에 따른 마산의거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마산은 1970년대 박정희 정권 당시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및 국토개발 10개년 계획 등의 일환으로 남동임해공업벨트가 들어서게 된다. 이에 마산에 한일합섬이 건설된다.

한일합섬은 경공업 중심의 상징과 같았다. 무엇보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은 본격적인 수출위주 정책을 펼치면서 익산과 마산을 수출자유지역으로 지정했다. 마산이 수출입이 유리한 항구지역이면서 엄청난 발전을 했는데 ‘마산’하면 ‘한일합섬’, ‘한일합섬’하면 ‘마산’이 떠오를 정도로 마산과 한일합섬은 떼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됐다.

하지만 1987년 6월 항쟁 이후 노동운동이 치열해지면서 노동자의 임금이 상승하면서 점차 가격경쟁력이 떨어지게 됐다. 그리고 1990년대 들어서면서 중국이 경제성장을 이뤄내면서 국제사회에서 한일합섬의 경쟁력은 더욱 떨어지게 됐다.

그러면서 한일합섬의 위세가 점차 위축되기 시작했다. 문제는 한일합섬의 위세가 위축되면서 점차 마산시도 위축되기에 이르렀고, 주변 도시 특히 창원시가 중공업을 중심으로 성장을 하는 반면 마산시는 더욱 축소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서면서 결국 ‘창원’ ‘진해’와 더불어 ‘마창진 통합’을 이뤄내면서 ‘창원시(통합)’가 만들어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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