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통한 과거리뷰] 고려거란전쟁 그리고 고려 현종
[오늘 통한 과거리뷰] 고려거란전쟁 그리고 고려 현종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4.01.26 14: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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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KBS2 ‘고려거란전쟁’ 역사 왜곡 의혹에 시청자들이 트럭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고려거란전쟁 시청자들이 26일 서울 여의도 KBS 본사 앞에서 트럭 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트럭시위를 통해 고려거란전쟁의 상식 밖의 극 전개와 역사 왜곡에 대해 항의를 하기 위해서이다.

특히 16회를 중심으로 고려 현종이 철부지 어린이가 됐다는 비판과 함께 ‘금쪽이’가 됐다면서

이른바 ‘현쪽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대하사극이라는 이유 때문에 결국 작가의 상상력이 들어가지만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꿔버린 것에 대해 시청자들이 단단히 화가 난 것이다.

3차 고려거란전쟁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

고려 현종은 2차 고려거란전쟁에서 몽진까지 하면서 거란의 침략을 막아냈다. 그리고 3차 고려거란전쟁에서 귀주대첩으로 승리를 했다.

고려 현종이 승리를 할 수 있었던 원인에는 몇 가지가 있다. 우선 김훈·최질의 난 진압이다. 2차 거란 침입 이후 군사력을 키우는 과정에서 관료들에게 지급해야 할 전시과에 문제가 생기면서이다.

중추원 일직인 황보유의와 중추원사 장연우가 경군의 영업전을 빼앗아 백관의 녹봉을 충당하려고 했다. 그러자 무인들이 반발해서 반란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자신의 녹봉을 빼앗는 일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러자 고려 현종은 무신들을 서경 장락궁에 초청, 연회를 베푼 사이 반란 주동자인 김훈, 최질 등 술에 취해버린 장군 19명을 모조리 숙청하고 나머지는 모두 항복을 받았다.

그리고 뒷수습을 잘했다. 19명 이외에 가족들은 한 명도 처형을 하지 않았고, 무신에 대한 처우도 개선을 했다. 아울러 전몰자에 대한 예우를 높여주면서 3차 칩입을 막아내는 원동력을 만들었다.

만약 이때 김훈·최질의 난을 진압하면서 무신들에 대한 처우를 더욱 나쁘게 했다면 3차 침입 때 과연 무신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을지는 두고 봐야 할 문제다.

동여진 침입 대비

고려 현종이 3차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 또 다른 대액으로는 여진과의 전쟁이었다. 여진은 바다를 통해 고려를 침략했는데 주로 발해의 항구를 이용해 고려의 동해안을 침략했다. 이에 고려 현종은 동해안에 동여진 해적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성을 축조했다.

또한 대대적으로 수군을 양성하면서 현종 10년에 이르러 무려 수백 척에 이르렀다. 이에 동여진 해적들이 많이 쇠퇴하게 됐다.

고려 현종이 부각강병을 위해 농업이 우선이라고 판단해서 여러 수공업 장인들을 감축하고 감축된 장인들을 모두 농업에 종사하게 했다.

지금의 시점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농업국가에서 농업 종사자가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국력이 더욱 강성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군현제 정비

고려 현종의 업적 중 가장 높이 평가할 업적이 바로 군현제 정비이다. 최초로 지방관을 파견해 난립하는 호족을 견제했던 유능한 군주였다.

고려 현종은 전국을 4도호부·8목·56지주군사·28진장·20현령을 뒀다. 이에 12명의 지방관 숫자가 이때 이르러 116명으로 확대됐다.

하지만 지방관 파견까지는 호족들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설득하는 모습을 보였다. 즉, 호족들과 정치적 갈등을 보인 것이 아니라 지방관 파견이 호족들에게는 더 좋은 일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에 호족들의 저항이 많지 않았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그것은 과거제를 통해 지방 호족들이 중앙정계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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