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2월 15일 동학농민운동 발발
[역사속 오늘리뷰] 2월 15일 동학농민운동 발발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4.02.15 09: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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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두장군 전봉준
녹두장군 전봉준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894년 2월 15일(음력 1월 10일)은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한 날이다. 동학농민운동은 동학 세력이 주축이 돼 일으킨 민란이다.

조선 왕실은 반란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일본군과 청군의 도움을 받아 혁명을 진압했다. 오늘날에는 높게 평가되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조선은 세도정치를 지나 대원군 집권 등을 겪으면서 그야말로 시스템이 붕괴됐고, 그 시스템 붕괴로 인한 농민들의 반발은 더욱 극심할 수밖에 없다.

세도정치에 무너진 시스템, 대원군 더욱 무너뜨려

조선시대는 이미 세도정치를 거치면서 시스템이 무너졌다. 그런데 그 무너진 시스템을 더욱 무너뜨리게 된 것이 바로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이다.

흥선대원군은 1865년 경복궁을 중건하기 위해 원납전을 받았다. 원납전은 원해서 납부하는 돈을 말한다. 말이 원해서 납부하는 돈이지 사실상 반강제적으로 납부하는 돈이었다.

여기에 흥선대원군은 원납전 액수에 비례해 벼슬이나 상을 걸었다. 과거에는 벼슬을 주는 것이 과거시험을 통해서만 가능했고, 과거시험을 거치지 않는다면 ‘명예직’으로 줬다. 하지만 원납전을 납부한 후 받는 벼슬은 실제 벼슬이었다. 대부분은 고을 수령 자리였다.

재력가 입장에서는 원납전을 상납한다면 실질적으로 고을을 통치하는 수령 자리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원납전에 대한 매력이 상당히 컸다.

특히 호남 지방은 재력가들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호남에서 생산되는 쌀은 재력가들의 배를 더욱 살찌게 만들기 때문이다.

전라도는 수탈의 대상

전라도는 곡창지대이면서 수탈의 대상이 됐다. 특히 전라 고부 군수(지금의 정읍시) 자리는 ‘부자’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이런 이유로 고부 군수에 앉는 것을 가문의 가장 큰 목표로 삼는 위정자들도 많았다. 고부 군수 몇 년 하고 나면 가문이 먹고 살 정도로 부자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고부 군수 자리에 조병갑이 앉았다. 조병갑은 만석보라는 대형 저수지를 축조해서 사용료를 받았다. 그리고 인근 태인 군수를 지냈던 아버지의 공덕비를 세우겠다면서 조세와 잡세를 걷어들였다. 그리고 양민들에게 강제적으로 노역을 부여하게 했다.

이로 인해 고부 고을 백성들의 원성은 자자했다. 이에 전봉준 아버지 전장혁을 대표로 삼아 탄원서를 제출했지만 곤장을 맞아야 했다. 결국 전장혁은 장독이 올라 죽고 말했다. 그러자 아들 전봉준은 봉기를 계획했다.

동학농민운동이 기존 민란과 다른 이유

동학농민운동이 기존 민란과 다른 이유는 ‘조병갑을 죽이고 한양으로 상경한다’는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것이 기존 민란과는 차이가 있다. 민란이 일어나면 백성들은 수령을 붙잡고 한양에 상소를 올린다. 상소를 올릴 때 “우리는 결코 역심을 품은 것은 아니다. 고을 수령의 수탈이 가혹해서 그에 따라 반발한 것 뿐이다”라는 뉘앙스의 내용을 올린다.

그러면 한양 조정에서는 선무사를 내려 보내 고을 수령을 파면하고, 선무사가 백성들을 위무한다. 이것이 기존 민란의 성격이다.

하지만 동학농민운동은 계획부터 ‘수령을 죽이고 전주까지 치고 올라가고, 한양까지 간다’는 것이다. 기존 민란과는 성격이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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