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골목과 갯벌에서 찾는 진정성, 머무름이 주는 특별한 선물
- 단순한 숙박을 넘어선 여행, 주민과 함께하는 '생활 같은 경험'

[파이낸셜리뷰=이동미 여행작가] 여행은 이제 많은 사람들의 삶에서 떼어낼 수 없는 요소가 되었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삶에 가장 잘 맞는 여행 방식을 찾아가고 있다. 미국의 한 문화·사회학자는 관광이 단순히 명소를 보는 것(sightseeing)에서 점차 ‘진짜(local, authentic)’를 경험하려는 욕망으로 진화한다고 했다. 여행의 본질은 빠른 일정 속에서가 아니라, 느리게 걷는 순간들 속에서 드러난다.
여행의 진화, 진정성을 향한 길
어느새 우리의 여행도 체험경제(Experience Economy)의 흐름 속에 들어섰다. 랜드마크를 찾아다니는 단순 소비에서 벗어나, ‘한 달 살기’처럼 현지인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경험을 추구하고 있다. 그 흐름 속에 강진의 푸소(FUSO), 제주의 카름(Karum), 순천의 쉴랑게(Shillange)가 있다. 느린 여행(slow travel), 로컬리즘(glocalism, hyperlocal), 한 달 살기(living like a local) 등 ‘임시적 이주 경험’을 추구하는 흐름 속에서 시도되고 있는 스테이 브랜드다. 이중 공동체적 지속 가능성을 시도하는 쉴랑게(Shillange)를 오버뷰 해보자.

‘쉴랑게’라는 이름에 담긴 의미
가장 최근에 시도되고 있는 쉴랑게(Shillange)는 전라도 사투리 “쉬어가자”라는 권유형 표현으로 여겨진다. 동시에 순천만 갯벌을 샤샤삭 기어다니는 흰발농게·칠게·붉은발말똥게가 연상되며, ‘게’라는 발음의 라임을 살린 듯하다. 바쁜 도시 생활 속에서 잠시 숨고 싶을 때, 갯벌 속으로 숨어드는 게처럼 순천의 쉴랑게에서 몸과 마음을 내려놓고 쉬어가라는 느낌이다.
쉴랑게 공식 홈페이지에는 한글의 ‘쉬다’와 독일어 ‘lange(오래도록)’의 합성어라 설명한다. 순천에 머물며 진정한 쉼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과 쉴랑게 스테이의 철학을 압축하는 표현으로 보인다.


한옥 스테이와 공방의 어울림
순천의 쉴랑게는 옥천, 동천, 순천만, 와온의 네 개 권역으로 나뉜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쉴랑게가 모여 있는 권역은 옥천이다. 조선시대 순천부읍성이 있던 지역으로, 서문터 안내소를 성곽 모양으로 세우고 주변에 향교와 한옥글방, 다양한 공방이 들어서 옛 흔적을 이어가고 있다. 골목마다 익살스런 그림과 정겨운 풍경이 걸려 여행자는 자꾸만 발걸음을 멈추게 되는 곳이다.
그 골목 끝에 나무 대문의 ‘한옥소리’, 낮에는 카페, 밤에는 한옥 스테이가 되는 ‘다올재’, 물소리로 아침잠을 깨우는 ‘옥천 풍경’이 자리한다. 잡지 화보 속 공간 같은 ‘수오재’, 레지던스 스타일의 ‘삼우’, 비대면 방식의 ‘어여와 1호’ 는 여행자의 다양한 취향을 존중한다.
유럽풍 레스토랑을 겸한 ‘유럽도자기박물관 호스텔’, 쉴랑게 임을 알려주지 않으면 알아채기 어려운 ‘순천 스무날’과 감각적인 ‘나모:온’까지 더해지며, 쉴랑게 선택 폭은 더욱 매력적이 된다.



장소성을 살린 쉼과 이야기
동천은 순천역 개통과 함께 만남과 이별이 교차하며 수많은 이야기가 쌓인 곳이다. 역을 중심으로 마을이 생기고 시장이 열리며 일상이 흩날리던 동네가 되었다.
이곳에는 이웃집 언니가 살 것 같은 ‘그꽃길 게스트하우스’, 유럽식 인문학 살롱을 추구하는 ‘아트 앤 스테이’, 주택의 변신을 실험하는 듯한 ‘세하’가 있고, 철도관사마을의 일본식 주택을 개조한 ‘팔마여관’이 있다. 여기에 모텔이라는 이름을 당당히 내세운 ‘코코모델’, 온실 같은 로비에서 담소 나누기 좋은 ‘스테이 두루’까지 더해져, 동천의 쉴랑게는 각자의 색깔과 가치가 단단하다.


UNESCO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순천만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곳이다. 이곳에는 전통 한옥 단지 스타일의 ‘숲펜션’, 포스트모던 감각을 자랑하는 ‘뉴 빌리지’, 부담 없이 들를 수 있는 ‘들마루 펜션’이 자리한다.
순천의 남쪽 해변, 순천만이자 크게는 여자만의 품에 안긴 와온 마을에는 소박한 ‘몽실고막이네민박’, 언덕 위 전망이 아름다운 ‘언덕 위의 집’ 그리고 노월 전망대와 가까운 ‘에코비치캐슬’이 여행자를 맞이한다.

머무름의 또 다른 이름, 쉴랑게
이처럼 쉴랑게는 순천 곳곳에 자리하며 순간들을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단순한 숙박이 아니라 지역의 장소성(place identity)을 경험하게 하는 관광 콘텐츠이자 전라남도 순천시의 체류형 스테이 브랜드다. 최근 관광은 단순 소비형 여행에서 벗어나 체류형·참여형·관계형으로의 전환을 강조한다. ‘쉴랑게’는 이러한 패러다임 속에서 지역 자원을 새롭게 해석하며 하이퍼로컬(hyper-local)한 체험을 제공한다. 철도관사마을의 오래된 집을 개조한 게스트하우스, 정원이 있는 한옥형 숙소, 골목 끝에 숨은 카페형 스테이까지. 공간의 형태는 다르지만 모두 같은 메시지를 건넨다.
“오늘은 순천 사람처럼 지내보라.”

그럼 쉴랑게에 머물러 보자. 쉴랑게에 들어서면 방 안 탁자나 침구 위에서 정갈하게 놓인 쉴랑게 어메니티가 여행자를 맞이한다. 안에는 순천 쉴랑게 마을 안내서와 권역별 위치 및 주요 스팟이 표시된 지도가 들어 있다. 주요 관광명소 다섯 곳(순천만국가정원·순천만습지·낙안읍성·뿌리깊은나무박물관·드라마촬영장)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쉴랑게 패스(Shilange Pass)와 네임택도 들어 있다.
재생 크라프트지 특유의 질감이 전해지는 쉴랑게 트래블 노트를 펼치면 알찬 구성과 섬세함에 놀라게 된다. 여행자는 자신만의 테마를 정하고 순천을 걸으며 여정 지도에 타임라인을 기록할 수 있다. 별도의 여행기록란에는 방문 시간과 장소를 정리할 수도 있으며 속지가 부족하다면 호스트에게 요청하면 된다. 체험 프로그램 할인 쿠폰, 감성을 자극하는 엽서, 로고 스티커가 함께 제공되며, QR코드를 스캔하면 다양한 활용법이 안내되어 여행의 재미를 더해준다.

여행자의 체화, 생활이 되는 여행
쉴랑게 여행 노트를 들고 순천 골목을 걷다 보면 분주한 걸음은 저절로 느려지고, 낯섦은 사라지며 어느새 순천 사람의 보폭을 닮아간다. 골목마다 표정이 다르다. 기찻길 옆 철도관사마을에서는 철도 가족의 일상이 속삭이고, 언덕 위 집에서는 붉은 노을이 하숙생처럼 창문을 두드린다. 그 순간 여행자는 손님이 아니라 마을의 삶을 공유하는 또 하나의 이웃이 된다.
역전시장 골목에서도, 와온 해변 전망대 길에서도 여행자는 쉴랑게 숙소와 마을 사람을 함께 만난다. 공간은 숙소, 골목은 관계, 체험은 삶의 단면으로 이어지며 여행은 생활로 확장된다. 지방 소멸이 가속화되는 한국 사회에서 쉴랑게는 잠시 머무는 집이 아니라 도시와 농촌, 여행자와 주민, 과거와 현재를 잇는 융복합적 플랫폼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제 여행자는 소비자가 아니라 참여자가 되고, 순천의 쉴랑게는 지역의 시간과 역사적 결을 보존하며 지역 재생(urban regeneration)과 문화콘텐츠를 결합한 모범 사례를 만들고 있다. 쉴랑게는 자체 프로그램을 운영하거나 지역 협동조합·활동가와 연결해 다양한 체험 연계를 추구한다. 거미줄처럼 촘촘하고 유기적으로 얽힌 이 관계망이 쉴랑게의 진정한 힘이다.

주민과 여행자를 연결하는 새로운 플랫폼
여행자가 직접 순천의 골목을 걸어 들어가 쉴랑게에 머무는 순간, 그것은 감각적 경험으로 바뀐다. 이웃집 아이가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시장에서 만난 할머니가 장바구니 속 풋고추를 나누어 주는 이 ‘일상적 순간’이 스테이의 핵심이다. 따라서 순천의 쉴랑게를 찾는다는 것은 단순히 방 하나를 빌리는 일이 아니라, 순천 사람의 일상 속으로 발을 들이는 일이다. 이제 쉴랑게에서 ‘순천 사람처럼 살아보기’를 시도해 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