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팔마여관, 다다미에 스민 햇살, 옛 관사의 퓨전 변신
- 철도마을 박물관, 월급봉투에서 찾은 철도 노동자의 생활사
- 세대를 잇는 플랫폼, 근대 유산의 재탄생

[파이낸셜리뷰=이동미 여행작가] 순천에는 특별한 공간이 있다. 전라선과 경전선이 만나는 교차점, 순천역 철도국 직원들의 주거지로 1936년 조성된 철도 관사 마을이다. 당시 152동이 세워졌으나 지금은 약 60동이 남아 있는 순천 조곡동 철도관사마을이다.
최근 일부는 카페와 전시관, 체험 공간으로 재생되었고, 마을 이름도 '철도관사마을'에서' 철도문화마을'로 변경되면서 ‘살아보는 여행’과 ‘웰니스 콘텐츠’를 접목한 도심 체류형 관광지로 재조명되고 있다. 또한, 옛 ‘팔마여관’은 쉴랑게로 변신해 이색적인 스테이 공간으로 주목받고 있다. 순천의 또 다른 얼굴을 만나고 싶다면, 이곳 철도문화마을을 찾아가 보자.
옛 7등 관사의 변신, 팔마여관
쉴랑게인 팔마여관에 도착하면 외관부터 흥미롭다. 이 건물은 1930년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적산가옥 양식의 목조 주택으로, 일본에서 삼나무를 들여와 조립해 만든 7등 관사였다.



북쪽으로 난 나무 대문을 열면 작은 잔디 마당이 현관으로 이어진다. 목재 벽과 미닫이창으로 이루어진 건물은 일본식 건축의 특징을 보여준다. 지붕에는 마름모꼴 돌판 기와(石板瓦, せきばんがわら)가 얹혀 있어 당시의 건축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다.
드르륵,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면 가장 먼저 다다미(畳, tatami)가 눈에 들어온다. 일본식 주거 문화를 상징하는 다다미는 길쭉한 매트 형태의 돗자리로, 보통 90cm × 180cm의 1:2 비율이다. 일본의 전통 주택은 이 다다미 크기에 맞춰 기둥 간격과 방 크기, 문 위치까지 설계되기에, 주거 공간의 기준 단위라 할 수 있다. 맨발로 디뎠을 때 전해지는 다다미 특유의 감촉이 인상적이다.
실내는 전통 구조를 간직하면서도 퓨전 양식으로 개량되어 있다. 원래 일본식 가옥에는 나무 바닥의 화장실이 실내에 있었으나, 지금은 현대식으로 바뀌었다. 중앙에 다다미가 깔리지 않은 공간이 있는데, 이는 과거 한국인들이 부엌으로 사용하던 자리다. 방은 총 세 개로, 미닫이문을 열면 서로 이어져 넓게 활용할 수 있으며, 욕실 두 개와 거실, 주방, 조리 공간이 갖춰져 있다.
다다미 방의 아늑함과 일본식 주거의 흔적
다다미 바닥에 앉아 창으로 은근히 스며드는 빛을 받으며 잠시 머물러 본다. 창살이 방 안쪽에 있고 창호지를 바깥쪽에 바른 구조는 우리나라 전통 방식과 달라 눈길을 끈다. 격자 모양 유리창과 창호지를 바른 창이 겹친 이중창 구조는 유리창 특유의 개방감과 블라인드식 아늑함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벽에는 일본식 벽장인 오시이레(押入れ, おしいれ)가 있다. 이는 현대의 붙박이장과 비슷한 형태로, 수평 칸막이 위쪽에는 요와 이불을, 아래쪽에는 생활 물품을 보관한다. 문은 나무틀에 종이를 바른 미닫이문으로, 공간을 분리하면서도 은은한 분위기를 만든다.
마루문을 열고 나가면 남쪽으로 난 앞마당 정원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팔마여관은 대문과 현관이 북쪽에 있지만, 집은 남향으로 앉아 따스한 햇살을 온전히 받는다. 넓은 앞마당에는 창고와 바비큐 시설이 마련되어 있는데, 창고는 팔마여관의 분위기에 맞춰 새로 지은 건물로 내부에는 세탁기와 건조기가 구비되어 있다.
마당 위로는 알전구가 줄지어 걸려 있어 스위치를 켜는 순간, 평범하던 마당이 순식간에 낭만적인 공간으로 변한다. 전체가 독채 구조이기에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며, 정원에서 즐기는 바비큐 파티는 한층 더 특별해질 수 있다.
골목마다 새겨진 철도 노동자의 생활사
짐을 풀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 관사마을 산책에 나선다. 골목 벽에는 관사마을에 살던 사람들의 사진이 붙어 있고, 잘 정비된 안내판이 곳곳에 있어 자꾸만 걸음을 멈추게 된다.


산책을 이어가다 보니 5등 관사와 4등 관사가 보이고, 영화 <화려한 휴가>의 촬영지로 쓰였던 8등 관사도 눈에 들어온다. 쉴랑게 스테이로 재생된 팔마여관은 원래 7등 관사였다.
철도 관사의 가장 큰 특징은 직급에 따라 구조와 규모가 달라진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3~5등 관사는 단독 건물로, 6~8등 관사는 두 가구 이상이 함께 사는 연립주택 형태였다. 또 직급이 높을수록 마을의 위쪽에 배치된 것도 흥미롭다.
철도마을 박물관, 아버지의 월급봉투
철도문화마을의 유래가 궁금해져 철도마을박물관에 들렀다. 1894년 6월 28일, 대한제국은 의정부 공무아문(지금의 국토교통부)에 철도국을 신설했다. 철도가 뻗어 나가자, 역은 곧 마을의 중심이 되고, 역을 지키는 이들을 위한 관사도 함께 세워졌다.


작은 역에는 몇 동 남짓한 소규모 관사가 들어섰고, 지방 철도국이나 철도 사무소가 있던 주요 거점에는 수십에서 수백 동에 이르는 대규모 집단 관사가 조성되었다. 경성, 부산, 대전, 안동, 평양 등지가 그 대표 사례다.
순천 역시 전라선과 경전선이 만나는 철도 교차점으로, 철도국의 주요 거점이 되면서 1936년 직원들을 위한 관사 152동이 세워졌다. 지금의 팔마여관은 그중 하나다.
철도마을 박물관에는 기증받거나 모아둔 철도 관련 물품이 전시되어 있다. 기차 안에서 차표에 구멍을 뚫어 확인하던 검표기, 날짜를 찍어주던 일부기, 마산기관차분소에서 만든 기준운전 취급 교재가 눈길을 끈다. 어릴 적 보았던 통표도 있다. 기차가 도착하면 기관사가 기차 앞머리에서 들고 서 있다가 고리에 걸던 가죽 링의 운전허가증이다.

박물관 안에는 순천전시사무소에서 근무했던 임동락 선생의 월급봉투도 전시되어 있다. 1983년 4월 급여 명세서로 기본급 29만 8천 원에 근속 수당과 가족수당이 더해져 34만 8천 원이 적혀있다. 거기서 재형저축 12만 원과 철우회비 150원, 각종 공제가 빠지고 나면 실수령액은 16만 6천 원이 된다.
사라진 곳과 남아 있는 곳, 그리고 관사마을에서의 저녁
1980년대 도시 재개발로 전국의 관사마을은 대부분 사라졌고, 일부 남은 관사들도 변형되거나 폐가로 방치된 경우가 많다. 순천 철도관사는 대규모 집단 관사로서 비교적 보존이 잘된 곳이다. 무엇보다 전·현직 철도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지금도 거주하고 있어, 마을의 역사적 의의가 크다.

한때 각종 모임과 회의가 열리던 옛 철도회관은 철도공사 독신자 아파트로 바뀌었고, 철도진료소에서 철도병원으로 이어졌던 건물은 현재 코레일 어린이집이 되었다. 직원들의 기숙사로 사용되던 곳은 승무원 합숙소로, 옛 철도 배급소는 ‘기적소리카페’로 새롭게 변신했다. 팔마여관 역시 게스트하우스로 재생되며, 관사마을 전체가 다양한 문화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순천은 철도와 함께 성장해 온 도시다. 관사마을이 ‘철도 도시 순천’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으며 지역 관광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어 칭찬과 응원을 보내게 된다.
맥주 캔을 하나 들고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다. 팔마여관과 닮은 모습의 관사들이 150동이나 줄지어 서 있었을 광경을 떠올리니, 영화 한 편을 보는 것 같다. 그 집 하나하나마다 누군가는 기관사로, 또 누군가는 정비사로 자신의 소임을 다하며 하루하루를 이어갔을 것이다.
낮에 박물관에서 보았던 월급봉투도 다시 떠오른다. 누런 봉투에 꾹꾹 눌러 적힌 숫자들은 단순한 금액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과 한 가정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골목 곳곳에 그려진 기차 그림과 아기자기한 철도 조형물들도 눈에 선하다. 관사마을은 철도 노동자 가족들의 노동과 통근, 생활문화가 녹아 있는 생활사 박물관 같은 곳이니, 여행자는 지금 그 박물관 속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있는 셈이다.
관사식당의 아침
아침은 ‘관사식당’에서 먹었다. 이름 때문에 호기심으로 들어갔는데, 벽에는 프랑스·일본 등지에서 온 방문객과 지역민들이 남긴 맛집 인증 글과 그림 코팅이 빼곡히 붙어 있다. 이곳의 별미가 콩가루를 찍어 먹는 삼겹살이라니, 다음에는 꼭 맛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침 메뉴로 뜨끈한 김치찌개를 주문했다. 뚝딱 차려진 밑반찬과 찌그러진 양은 냄비에 보글보글 끓는 찌개가 식욕을 돋운다.

든든하게 식사를 마친 뒤, 눈길을 사로잡는 이정표를 따라간다. 헉헉 숨을 몰아쉬며 하늘 계단을 오르니 ‘기적소리 전망대’에 닿는다. 탁 트인 풍경과 함께 철도문화마을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계획적으로 조성된 마을답게 관사들은 바둑판처럼 격자형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지금도 차량이 오가는 데 큰 불편이 없다. 전망대 한켠에는 기관실 모형이 있어, 기관사가 된 듯 순천을 향해 기차를 몰아 본다.
근대문화유산, 세대와 세대를 잇는 플랫폼
팔마여관으로 다시 돌아오니 이제는 집처럼 익숙하다. 현재 이곳은 ‘색다른 녀석들’ 협동조합에서 관리·운영하고 있다. 협동조합은 팔마여관과 함께 ‘순천집’을 숙박 공간으로 운영하며, 순천 한 달 살기, 캠핑 페스티벌 등 로컬 중심의 콘텐츠와 체류형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건축 유산을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문화·관광·창업 공간으로 확장하고 있어 젊은 세대에게는 카페·스테이·페스티벌로, 기성세대에게는 기억과 향수를 공유하는 소통의 장을 열고 있다.
다시 바라본 철도문화마을은 순천을 대표하는 근대문화유산이다. 융복합 콘텐츠의 기반이자 세대 교류의 플랫폼으로 성장할 무한한 잠재력을 품고 있으며, 그 중심에 쉴랑게 팔마여관이 있다. 철도와 함께 살아온 사람들의 집단 기억이 머무는 장소이자, 근대 주거 양식을 체험할 수 있는 매우 의미 있는 공간이다.
# 간단 정보
2025 순천마을여행주간 / 2025년 9월 1일~10월 31일
팔마여관 / 주소 순천시 자경2길 22-26
순천철도마을박물관 / 주소 순천시 자경2길 10-5
순천철도문화체험관 / 주소 순천시 자경2길 22-19
관사식당 / 주소 순천시 자경1길 1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