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제2차 오일쇼크 그리고 부마항쟁
[역사속 경제리뷰] 제2차 오일쇼크 그리고 부마항쟁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6.03.09 14: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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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우리나라는 1973년 제1차 오일쇼크를 간신히 극복하고 경제성장을 이뤄내고 있었다. 하지만 곧바로 2차 오일쇼크가 발생하면서 그에 따라 엄청난 경제적 타격을 입었다. 특히 부산과 마산 경제가 휘청이면서 김영삼 제명 등 정치 파동이 일어나면서 부마 항쟁이 일어났다.

부마 항쟁을 어떤 식으로 해결을 할 것인지를 두고 박정희 당시 대통령, 차지철 경호실장 그리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시각 차이가 보이면서 1979년 10월 26일 결국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에 의해

1970년대 들어서면서 박정희 정권은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1978년 이란혁명이 발발됐고, 1979년 2차 오일쇼크가 발생했다.

1차 오일쇼크는 선진국 등에 큰 영향을 줬지만 2차 오일쇼크는 국내 정치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란혁명이 발발하면서 이란에서의 석유 생산량이 급감했다. 그러면서 1979년 원유 도입값이 상승으로 이어졌다.

우리나라에 큰 타격인 것은 우리나라가 중화학공업으로 치중했기 때문이다. 원래 장면 정권은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우면서 소비재 생산에 초점을 맞췄지만 박정희 정권은 소비재 생산이 아닌 중화학공업에 맞췄다.

중화학공업은 석유와 맞물리는 경제구조이기 때문에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오일쇼크는 엄청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에 1978년 물가상승률이 14%에서 1979년 18%로 급상승했고, 이는 설비 투자 증가율을 꺾게 만들었으며, 파산과 해고로 이어지게 됐다.

부산과 마산은

특히 부산과 마산은 그야말로 직격탄이었다. 1977년 경제성장률이 약 12.7%, 1978년 약 9.7%, 1979년 약 6%, 1980년 약 –5.2%를 기록했다. 고도성장기에 2차 오일쇼크로 인해 갑자기 성장률이 급격히 꺾인 것이다.

문제는 부산과 마산은 수출 경공업 중심 도시였다. 부산 지역 총생산 증가율은 1976년 30.5%, 1978년 16.7%, 1979년 5.6%로 전국 성장률보다 낮은 수치고, 시민들이 체감하는 불황은 상당히 컸다.

이에 1979년 부산 기업 부도율은 전국 평균의 약 2.4배이고, 서울의 약 3배 수준이었다. 당시 부산은 수출 의존 중소기업 중심 산업구조였기 때문이다. 아울러 임금 수준을 보면 서울을 100으로 하면 부산이 74.3로 전국 최하위 수준이었다.

마산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1979년에는 약 24개 기업이 휴업·폐업을 했으며 이에 5~6천명이 실직해야 했다. 이에 공장 가동률은 하락했고, 노동자의 임금 체불 등의 현상이 발생했다.

도시 빈민 증가

게다가 부산과 마산에는 일자리를 찾아 급격한 인구 증가가 일어나면서 주택 부족, 전세 폭등, 도시 빈민 증가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

이런 불안은 결국 사회경제적 압박이 되고, 그것은 정치적 불만으로 이어졌다. 그런 가운데 YH 여공 사태가 발생했고, 그로 인해 김영삼 총재가 국회의원직에서 제명이 되자 결국 부산과 마산 시민들이 폭발했고, 그에 10.26 사건까지 이어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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