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에야 보이는 것들] 4. 술 먹는 돈은 회사서 주지만 내 몸은?
[퇴직 후에야 보이는 것들] 4. 술 먹는 돈은 회사서 주지만 내 몸은?
  • 김 식 수필가
  • 승인 2026.05.27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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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식 수필가

[파이낸셜리뷰] 직장을 옮겨 홍보 업무를 맡았을 때, 나는 곧 새로운 세계에 들어섰다는 것을 직감했다. 사무실 안보다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고, 기획서보다 술잔이 더 자주 오가는 부서. 무슨 일이든 ‘한 잔 하시죠’로 시작하고, 또 그렇게 마무리됐다. 언론과의 관계도, 내부 갈등의 봉합도, 때로는 상사의 기분 맞추기까지. 다 술자리에서 해결되곤 했다.

​“자네가 한턱 낼 차례지?”

“이런 성과면 회포 좀 풀어야지 않겠어?”

​처음엔 영광처럼 느껴졌다. 상사나 임원들과 같은 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는 분위기. 인정을 받는 것 같았고, 내가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게다가 회사 카드는 마법의 카드였다. 오늘 술값은 걱정 말고, 마음껏 먹고 마시라 했다.

​그렇게 업무상 술자리가 늘었고, 개인적인 술자리까지 합치면 일주일 내내 술을 마셨다. 점점 내 몸은 회사의 연료처럼 소모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이 들어가는 만큼 내 건강은 빠르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출근길 거울을 봤다. 탁한 눈빛, 부은 얼굴, 푸석한 피부. 이게 정말 내 모습인가 싶었다. 그러고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술 먹는 데 드는 돈은 회사에서 다 내주지만, 그로 인한 병원비는 누가 책임지지?'

'그렇게 망가진 내 간은, 내 위장은, 내 정신은 누구의 몫이지?'

​그 질문은 결국 내게 돌아왔다. 모든 건 결국 내가 치러야 할 대가였다.

​한창 바쁠 때는 오전 미팅이 끝나면 점심을 걸러가며 일했고, 오후엔 갑작스레 잡힌 인터뷰와 보도자료 작성, 기획회의, 보고서 수정이 이어졌다. 그렇게 하루 종일 정신없이 보내다 보면 저녁에 남는 건 피곤과 허기, 그리고 “오늘 한잔 어때요?”라는 말뿐이었다.

​술자리에서는 웃어야 했다. 분위기를 맞춰야 했다. 언론사와의 회식 자리에서는 끝까지 자리를 지켜야 했고, 상사 눈치를 살피며 언제까지 자리를 비우지 말아야 하는지도 계산해야 했다. 어떤 날은 속이 뒤틀려도, 어떤 날은 속으로 눈물을 삼키면서도 소주잔을 들었다.

​그런 날이 쌓이면서, 점점 내 삶은 피로와 무감각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들고, 업무 중엔 집중력이 떨어졌으며, 사소한 말에도 짜증이 났다.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는 말했다.

​“간 수치가 경고 수준입니다. 이대로 가다간 간경변으로 이어질 수 있어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간이 보내는 신호를 나는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사실 알고 있었다. 그렇게 계속 마시면 안 된다는 걸. 하지만 당장 눈앞의 자리, 눈치, 업무의 연장선처럼 느껴지는 술자리를 거절할 용기가 없었다.

​홍보팀 특성상 ‘술을 마시는 능력’이 업무 능력처럼 여겨지는 분위기도 한몫했다. 어떤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홍보는 입으로만 하는 게 아니야. 술로도 해야지.”

웃어넘겼지만, 그 말은 꽤 정확했다. 나는 입이 아니라 간으로 일하고 있었다.

​어느 날, 회식 자리에 불참한 어느 후배가 생각났다. 그는 “건강 때문에 요즘은 술을 자제하고 있다”며 단호하게 말했고, 상사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날 이후 후배는 중요한 업무에서 조금씩 밀려나는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그를 부러워하면서도, 감히 그 용기를 내지 못했다.

​회사 밖에서 자주 듣던 말이 있다. “카드는 회사가 긁어주지만, 간은 자기가 갉아먹는다.” 그땐 웃고 넘겼다. 그런데 웃을 일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내 몸을 회사에 외주를 준 셈이었고, 나는 내 몸의 주인이 아니었다.

​퇴사 이후, 술자리가 사라지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얼굴이 환해지고, 아침이 가뿐해졌다. 생각이 또렷해졌고, 마음도 조금씩 맑아졌다. 10년 넘게 내가 내 몸에 얼마나 무심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지금은 아침 산책을 하면서, 또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이런 생각을 한다.

'회사가 주는 건 잠깐의 인정이었고, 내가 잃은 건 오래도록 돌려야 할 내 건강이었다.'

​건강은 한 번 무너지면 회복이 쉽지 않다. 회사는 언제든 새 사람을 뽑을 수 있지만, 내 몸은 대체 불가능한 단 하나다. 나는 그 소중한 몸을 소모품처럼 다루었다. 누군가는 아직도 그렇게 살고 있을 것이다. 오늘도 누군가는 회식 자리에서 소주잔을 비우며 스스로를 깎아내리고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말하고 싶다.

“술 먹는 돈은 회사에서 줄 수 있어도, 망가진 몸은 회사가 대신 회복해주지 않는다. 늦기 전에, 정말 늦기 전에, 내 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김 식 수필가 약력

現 칼럼니스트 활동
2011년 산문집 <난향 바라기> 출간
2007~2018년 건설 홍보실 근무
2004년 <시사문단> 수필 등단
1996~2007년 신문사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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