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조와 서인 합작 조작극 의혹… 호남 사림 1천여 명 희생 아픔
- 미륵신앙 결속한 혁명 공동체 대동계, 화합과 평등의 가치로 계승
- 전주 혁신도시 '정여립로' 명명… 지워진 역사의 진정한 복권

[파이낸셜리뷰=조용식 기자] 조선 시대 최대의 정치적 참극으로 불리는 기축옥사의 이면을 파헤치고 정여립의 대동사상을 학술적으로 재조명하는 '정여립과 기축옥사' 세미나가 지난 30일 전북 김제시 김제문화원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김제문화원이 주최한 이번 행사에는 김제문화원 회원을 비롯해 동래 정씨 종중, 곤재 정개청 가문, 남평의 이발 가문, 나주 나씨 가문, 광산 이씨 가문, 유몽정 가문, 조대중 가문 등 기축옥사의 참화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문중 관계자들이 대거 참석해 잃어버린 역사의 진실을 규명하는 데 뜻을 모았다.
대동(大同)의 꿈, 김제에서 다시 태어나다
박현 김제문화원장은 인사말에서 "김제 성씨 집성촌 뿌리 기록 사업을 추진하면서 동래정씨 대호군파에서 분파된 복재공파 정곤과 풍천공파 정수홍의 가족계보에서 풍천공 5대손이 수찬 정여립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라며 "조선 역사의 한 획을 그은 기축옥사 사건 주인공의 뿌리가 바로 김제였다"고 밝혔다.



박 원장은 "성덕면 능제 옆에 정여립 추모의 단이 모셔져 있어 김제문화원에서 정여립 사상과 활동 사항에 대해 재조명을 하기 위해 이번 세미나를 개최하게 된 것"이라고 개최 취지를 설명했다.
이현서 김제시 부시장은 축사를 통해 "오늘 세미나는 대동의 세상을 꿈꾸었던 정여립 선생의 역사를 단편적인 기록이 아닌 대동사상과 조선의 정치사 그리고 민간 신앙과 사상의 흐름까지 다각도로 조명한다는 점에서 매우 뜻깊다"라며 "지나간 역사를 되짚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김제 그리고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정자 김제시의회 의장 역시 "정여립 선생의 처가가 김제 금구 지역에 정착해 살았다는 이야기는 이 사실만으로도 깊은 인연"이라며 "이번 세미나가 정여립과 기축옥사를 학술적으로 다시 들여다보고, 김제와의 연고를 균형 있게 구명해 나가는 뜻깊은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전했다.
치밀하게 조작된 역모와 피로 얼룩진 호남 사림의 참상
신귀백 작가의 사회로 막을 올린 세미나의 첫 번째 주제발표는 신정일 대동사상기념사업회 이사장이 맡아 '기축옥사와 기축옥사가 남긴 상혼들(피해자들을 중심으로)'이라는 주제로 심도 있는 서사를 풀어냈다.


정여립의 죽음은 1589년 기축년, 진안 죽도로 숨어들어 아들 옥남과 함께 목숨을 끊은 것으로 관변 기록인 《선조실록》 등에 적혀 있으나 이는 수많은 의문점을 내포하고 있다. 신 이사장은 이를 동인 세력을 향한 서인의 치밀한 기획 조작으로 강하게 의심했다.
역모를 꾀했다는 명확한 물증이나 거병의 흔적이 전혀 없었으며,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대동계를 조직해 무술을 연마했던 사실은 정권의 입맛에 따라 하루아침에 반역을 위한 군사 훈련으로 둔갑했다. 특히 관군의 포위망 속에서 정여립이 자결했다는 발표는 동인을 소탕하기 위해 그를 살해한 뒤 자결로 위장했을 가능성을 짙게 암시한다.
기축옥사의 전개 과정을 낱낱이 지켜본 유성룡은 《운암잡록》을 통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정여립은 조선 중기의 모반자로 <중략> 본래 서인(西人)이었으나 집권한 동인(東人)에 아부, 죽은 스승 이이를 배반하고 박순·성혼 등을 비판하여 왕이 이를 불쾌히 여기자 다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고향에서 점차 이름이 알려지자 정권을 넘보아 진안 죽도에 서실을 지어놓고 김제 금구 제비산 자락에서 대동계를 조직, 신분에 제한 없이 불평객들을 모아 무술을 단련시켰다. <중략> 이때 안악 군수 이축(李軸)이 이 사실을 고변하여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히자 아들 옥남(玉男)과 함께 진안 죽도로 도망하여 숨었다가 잡히자, 관군의 포위 속에서 자살하고 말았다.이 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났으며 정여립을 비롯한 동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 천여 명의 지식인이 희생되었고 전라도를 반역향(叛逆鄕)이라 하여 호남인들의 등용이 제한되었다"
정여립의 죽음은 곧바로 피비린내 나는 참혹한 서막이 되었다. 위관을 맡은 서인의 핵심 정철은 정적인 동인 세력을 향해 무자비한 숙청의 칼날을 휘둘렀다. 정여립과 서신 한 장을 주고받은 호남 선비들조차 역모의 굴레를 썼으며, 여든이 넘은 노모와 어린아이까지 잔혹한 고문을 받다 목숨을 잃은 광산 이씨 문중을 비롯해 화순의 조대중 가문 등 호남 일대에 뻗어 있던 동인 인맥은 멸문지경에 이르렀다.
수우당 최영경, 곤재 정개청 등 당대의 명망 있는 학자와 관료들이 줄줄이 옥사하거나 사약을 받았고, 옥사가 진행된 3년여 동안 무려 1천여 명이 죽거나 유배를 떠났다.
백사 이항복의 만장에 담긴 지식인의 절망과 비통함
기축옥사의 광풍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의 참상은 백사 이항복이 남긴 만장(輓章)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당시 우의정이었던 정언신이 역모에 연루되어 귀양을 가고 큰 화를 입자, 상소문을 대필했던 그의 아들 정율은 부끄러움과 한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죽은 정율과 깊은 교분이 있었던 이항복은 그를 추모하는 글을 지어 무덤 속에 넣었다. 훗날 정율의 아들 정세규가 장성하여 묘를 이장할 때 꺼낸 만장에는 당시 지식인들이 느껴야 했던 극도의 공포와 비통함이 절절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이항복은 "내 아직 속됨을 면하지 못하여 입이 있으나 말할 수 없고 눈물이 쏟아져도 소리 내어 울 수도 없네. 베개를 어루만지며 남이 엿볼까 두려워서 소리를 삼켜가며 가만히 울고 있네. 어느 누가 잘 드는 칼날로 내 슬픈 마음을 도려내어 주리"라며 당대의 숨 막히는 탄압 속에서 소리 내어 울 수조차 없었던 절망적인 심경을 남겼다.
지워진 흔적과 '정여립로' 제정을 통한 역사적 복권
반역향으로 낙인찍힌 호남에 가해진 흔적 지우기는 가혹했다. 전주 남문 밖 정여립의 생가 터는 역적의 땅이라며 집터를 숯불로 지지고 깊게 파내어 연못인 '파소(파쏘)'를 만들었다. 전주 기린봉에 남은 동래 정씨 11촌 일가의 묘소 석물은 목이 잘렸고 소세양이 지은 비문은 산산조각이 났다. 김제 금구의 조상 묘 역시 모조리 파헤쳐졌다.
그럼에도 '천하공물설'과 '대동사상'을 기치로 내걸었던 정여립의 공화주의적 사상은 소멸하지 않았다. 그의 선구적 사상은 허균의 '호민론', 정조 시대 정약용의 '탕무혁명론'으로 이어졌고, 1894년 동학농민혁명으로 분출되며 근대적 민주 사상의 맹아로 자리 잡았다.


이처럼 처참하게 지워진 역사의 상흔을 치유하기 위한 노력은 현재 진행형이다. 신정일 이사장은 전주시 명칭제정위원으로 활동하며 전주 혁신도시에 '정여립로'와 '정언신로'를 조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전주방송 앞 대로를 '정여립로'로 명명하게 된 배경에는 정여립이 과거 상관면에 거주할 당시 서울로 과거를 보러 가거나 금구 지역에서 대동계를 조직하러 갈 때 이 길을 이용했다는 역사적 발자취가 결정적인 근거로 작용했다.
이러한 명확한 논리에 힘입어 이견 없이 도로명 제정이 통과되었으며, 신 이사장은 이를 두고 해방 직후 국가 정체성을 세우기 위해 을지로, 퇴계로, 충무로를 제정한 것과 같은 맥락의 진정한 역사적 '복권'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아울러 혁신도시 내에 '정언신로' 역시 나란히 지정되면서, 기축옥사로 희생된 인물들의 명예 회복과 잃어버린 역사적 흔적을 도로명으로 되살리는 상징적인 발판이 마련되었다.
신 이사장은 억울하게 꺾인 희생자를 기리고 대동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김제 시내나 제비산 초입에 정여립 동상을 건립하고, 금산사 아래에 '대동사상 기념관'과 '대동정'을 세워 진실을 복원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왜곡된 승자의 기록, 붕당 정치의 암투와 이조 전랑
두 번째 발제자로 나선 이덕일 동방문화대학원 교수는 '조선당쟁과 기축옥사'라는 주제를 통해 16세기 권력을 향한 붕당 정치의 암투가 낳은 비극을 역사적 맥락에서 풀어냈다. 사림 세력이 권력을 장악한 뒤, 권력 독점을 견제하기 위해 만든 대간 인사권 '이조 전랑직'을 둘러싸고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했다.


이 교수는 기축옥사가 단순한 반란 사건이 아니라 왕권을 강화하려던 선조와 권력을 노린 송익필 등 서인 세력이 치밀하게 합작한 정치적 숙청 작전임을 명확히 했다.
신분제가 엄격했던 사회에서 왕조차 교체될 수 있다는 정여립의 '천하공물설'과 만민 평등의 '대동계'는 절대 왕정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간주되었다. 서인 세력이 치밀하게 엮어낸 모함 속에서 희생된 정여립의 죽음은 동인 말살의 신호탄이었다.
그 결과 기축옥사로 동인의 핵심 지식인 1,000여 명이 희생되었고, 불과 3년 뒤 발발한 임진왜란에서 조선은 나라를 지킬 유능한 장수와 관료를 모두 잃어 방어 체계가 붕괴되는 뼈아픈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 교수는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해 온 노론과 일제 식민사관의 기록에서 벗어나, 평등한 사회를 꿈꾸었던 대동 사상을 한국사의 중요한 지적 자산으로 재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층민과 당취의 결속, 미륵신앙으로 피어난 혁명
세 번째 발제를 맡은 조용헌 칼럼니스트는 '정여립의 대동계와 불교 당취'를 주제로, 대동계가 무사 집단을 넘어 신분 타파를 갈망하던 기층민과 반체제적 불교 승려인 당취가 결속한 민중 연합체였음을 짚어냈다. 운봉의 승려 무업과 의엄 등이 대동계에 가입했다는 자백은 정여립과 불교 세력 간의 깊은 연관성을 증명한다.


특히 신분 차별이 사라진 세상을 도래케 한다는 호남 금산사 중심의 '미륵신앙' 교리는 정여립의 평등사상과 맞물려 땡추 승려들과 하층민을 대동계의 핵심 세력으로 결집하게 만드는 강력한 이념적 동력이 되었다.
조 칼럼니스트는 임진왜란 전부터 산속에 은거하던 당취 승려들이 일본 첩자들의 정탐 활동을 간파하고 맞서 싸우는 역할을 수행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명종의 후궁 소생으로 정통성이 취약했던 선조가 과거 자신을 예언해 준 서산대사를 기축옥사에서 살려주었고, 이 인연을 바탕으로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가 5천 명의 대규모 승병을 동원해 나라를 구하는 역사적 결과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정여립이 남긴 반체제 사상과 대동계의 이상은 백성들의 열망 속에서 훗날 조선 후기 사회 변혁을 이끄는 '정감록' 신앙의 끈질긴 발단이 되었다.
지역 사회 화합의 동력으로 되살아나는 대동정신
주제발표 이후 진행된 토론회에서 김현조 대동사상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은 "과거의 아픈 역사를 들춰내는 것에 머물지 않고, 대동계가 보여준 화합과 평등의 정신을 지역 사회 발전의 동력으로 승화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진 종합토론에서는 최영기 교수를 중심으로 발제자와 문중 참석자들이 한데 어우러져 기축옥사에 얽힌 다양한 역사적 해석을 활발히 논의했다.
참석자들은 승자의 왜곡된 기록에 억눌려야만 했던 무고한 패자들의 억울한 목소리를 되찾고, 단절된 비극의 역사가 아닌 모두가 차별 없이 어우러지는 대동정신의 미래지향적 계승에 공감대를 형성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