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흥행 의존 벗어나 기획 단계부터 여행 동선 짜는 '사전 설계'
- 파리는 우연 하코다테는 전략…구경 넘어 '행동하는 공간'으로
- 콘텐츠가 '찾아갈 이유' 주면, 지자체는 '머물 이유' 채워야

[파이낸셜리뷰=조용식 기자] “우리는 늘 콘텐츠가 성공한 뒤에 움직였습니다.”
한국 드라마 관광의 현실을 날카롭게 짚은 한마디였다. 지난 27일 서울 더 플라자 호텔 서울에서 열린 ‘제2회 요즘, 한국관광 데이터 세미나’에서 유상원 스튜디오드래곤 부사장은 ‘대한민국을 테마파크로 설계하라(K-드라마를 통한 지역관광 활성화)’라는 주제의 발표를 통해 K-콘텐츠와 지역 관광이 결합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IP 코딩(사전 설계)’을 제시했다.
그의 문제의식은 명확했다. 2002년 ‘겨울연가’를 기점으로 한국의 드라마 관광은 20여 년간 비슷한 사이클을 반복했다.

작품이 흥행하면, 팬들이 촬영지를 찾아오고, 지방정부와 기관이 뒤늦게 표지판을 세우고 포토존을 만든다. 하지만, 드라마가 끝나고 대중의 관심이 식으면 관광객도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유 부사장은 이를 콘텐츠 흥행에만 의존하는 ‘럭키(Lucky)’ 방식이라 규정하며, 기획 단계부터 여행을 함께 설계하는 ‘스트래티지(Strategy·전략)’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파리는 '럭키', 하코다테는 '스트래티지'
유 부사장은 파리와 하코다테의 사례를 비교하며 콘텐츠 관광의 본질을 설명했다. 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한 ‘에밀리, 파리에 가다’는 빵집과 카페로 팬들을 이끌었지만, 이는 파리시가 사전에 설계한 것이 아닌 흥행 후 관광객이 자연스럽게 찾아온 ‘럭키’ 사례다.


반면, 일본 홋카이도의 하코다테는 달랐다. 지방정부가 콘텐츠 공개 전부터 제작사와 협력해 관광명소와 에피소드를 연결하고, 스탬프 랠리와 래핑 버스, 전시회까지 미리 준비해 팬들이 도착하는 순간부터 무엇을 할지 명확한 동선을 제시했다.
그는 뉴질랜드 호비튼 마을과 유니버설스튜디오의 해리포터 테마파크를 언급하며 ‘행동 설계’의 중요성도 짚었다. 관광객은 영화 촬영지를 겉핥기로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샤이어 언덕을 걷고 마법 지팡이를 사며 버터맥주를 마신다.
작품 속 세계관으로 직접 들어가 주인공처럼 행동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유 부사장은 “무엇을 봐야 하는지보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먼저 설계되어야 한다”고 부연했다.
공간과 행동을 심는 ‘IP 코딩’의 힘
유 부사장이 제안한 ‘IP 코딩’은 대본을 집필하는 단계부터 팬들이 현실에서 찾아갈 공간을 염두에 두고, 그곳에서 취할 행동을 작품 서사 안에 엮어 넣는 방식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늑대아이’가 실제 도야마현의 풍경을 배경으로 삼아 제작 단계부터 현실 관광과 연계한 것처럼, 처음부터 현실의 장소를 촘촘히 엮어내는 접근이다. 사후 추적형이던 기존의 관광 마케팅을 사전 설계형으로 완전히 뒤바꾸는 셈이다.
이러한 전략은 신규 작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유 부사장은 방영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난 ‘도깨비’의 강릉 주문진 방파제를 예로 들며, 기존 IP도 새롭게 활성화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단순히 촬영지 표지판만 남기는 대신, 상징적인 오브제나 극 중 장면을 체험할 수 있는 장치를 현실에 구현하면 관광객이 다시 찾을 명분을 제공할 수 있다.
스튜디오드래곤은 현재 한국관광공사와 손잡고 전국의 드라마 촬영지를 상징적인 조형물과 체험형 콘텐츠로 연결해 여행코스로 만드는 ‘한류 올레길’ 조성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양사는 지난 6월 업무협약을 맺고 드라마 촬영 전 단계부터 관광 요소를 반영하는 한편, IP와 연계한 체험형 관광 콘텐츠 개발에도 협력하기로 했다.
이는 이미 흥행한 드라마의 촬영지를 단순히 찾아가는 데 그치지 않고, 콘텐츠 속 공간과 행동, 기억을 실제 여행 경험으로 확장하려는 시도다. 유 부사장이 이날 강조한 ‘IP 코딩’의 구상을 현실 관광으로 옮기는 작업과도 맞닿아 있다.
콘텐츠·지방정부·관광공사의 삼각편대
발표가 끝날 무렵, 유 부사장은 “콘텐츠(IP)만 있다고 여행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뼈있는 지적을 남겼다. 항공편과 셔틀버스, 숙박과 예약 시스템, 현지의 먹거리와 볼거리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체류형 관광으로 이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이날 세미나의 핵심 화두였던 지방공항 활성화와도 맥락을 같이 한다. 콘텐츠 회사가 ‘찾아갈 이유’를 만든다면, 지방정부는 그들이 머물 인프라와 ‘머물 이유’를 조성하고, 관광공사는 이 둘을 유기적으로 연결해야 한다.
흥행작의 뒤꽁무니를 쫓는 관광에서 벗어나 기획 단계부터 치밀하게 동선을 설계하는 것, K-콘텐츠 관광이 다음 단계로 도약하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지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