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현대자동차 구사대 이수기업 폭력사건 진상조사단과 이용우 더불어민주당 의원, 정혜경 진보당 의원은 10일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현대차의 불법파견과 부당노동행위, 이른바 구사대 폭력에 대한 고용노동부의 특별근로감독을 철저히 진행하고 결과를 조속히 발표하라고 촉구했다.
진상조사단에 따르면 논란의 발단은 현대차 울산공장에서 수출용 차량 이송 업무 등을 담당했던 사내하청업체 이수기업 노동자들의 고용 문제다. 일부 노동자들은 불법파견 소송에서 대법원 판결을 받았고, 업체 폐업 이후 해고된 노동자들은 고용 문제 해결을 요구해왔다.
2025년 3월과 4월 현대차 울산공장 앞에서 열린 집회에서는 해고노동자와 연대 참가자, 현대차 보안운영팀 소속 직원들 사이에 물리적 충돌이 발생했다.
이후 노동·인권·법률단체가 진상조사단을 구성했고, 현대차 보안운영팀을 ‘구사대’로 규정해 관련자들을 고소·고발했다. 진상조사단은 당시 보안운영팀 직원들이 집회 참가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진상조사단은 지난해 10월 시민 1120명이 특별근로감독을 청원했고 국정감사에서도 관련 문제가 다뤄졌지만 특별근로감독이 올해 2월에야 시작됐다고 지적했다. 이후에도 감독기간이 세 차례 연장됐다며 노동부에 신속한 조사와 결과 발표를 요구했다.
그런데 이번 사건에서 눈길을 끄는 단어가 하나 있다.
바로 ‘구사대’다.
구사대란 무엇인가
구사대는 한자로 ‘救社隊’라고 쓴다. 말 그대로 ‘회사를 구하는 부대’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노사분규 과정에서 회사 측이 파업이나 공장 점거 등에 대응하기 위해 동원했던 인력을 ‘구사대’라고 불렀다.
회사에 따라 관리직 사원, 비조합원, 경비인력 등이 동원됐고, 일부에서는 외부 용역인력을 끌어들였다. 이에 회사에는 ‘구사대’라는 정식 부서가 없었다.
노동운동 진영에서는 파업이나 농성에 대응하는 회사 측 인력을 구사대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특히 이들이 노동자들과 물리적으로 충돌하면서 단어 자체에 강한 부정적 의미가 붙었다.
시설을 지키는 경비인력이라는 의미를 넘어 노동조합 활동이나 파업을 저지하기 위해 동원되는 회사 측 물리력이라는 이미지가 형성된 것이다.

구사대는 언제부터
구사대라고 부르는 회삭 측 인력이나 외부세력을 이용해 노동쟁의를 막으려는 역사는 상당히 오래됐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1978년 동일방직 사건이다. 여성 노동자들의 민주노조 활동을 방해하는 과정에서 이른바 ‘똥물 사건’까지 발생했다. 1979년 YH무역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 역시 경찰의 강제진압으로 끝났다. 그러다가 구사대라는 용어가 전국적으로 알려진 계기는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한국 사회에는 정치적 민주화의 공간이 열렸고, 그동안 억눌렸던 노동자들의 요구도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출발점 가운데 하나가 울산 현대그룹이었다. 7월 5일 현대엔진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했고, 7월 16일에는 현대미포조선 노동자들의 노조 결성 과정에서 신고서류를 빼앗기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갈등이 커졌다.
8월 17~18일에는 현대그룹노조연합 소속 노동자 약 3만명이 울산에서 대규모 가두시위를 벌였다.
울산에서 시작된 흐름은 마산·창원과 부산·거제 등 영남지역으로 번졌고 이후 수도권과 비제조업 사업장으로까지 확산됐다.
1987년 한 해 발생한 노동쟁의 3749건 가운데 무려 3341건이 7·8·9월 석 달 동안 집중됐으며, 노동조합 역시 1986년 2675개에서 1987년 말 4103개로 증가했다.
노동자들이 요구한 것도 단순한 임금 인상만이 아니었고, 자유로운 노동조합 결성과 노동3권 보장, 8시간 노동, 작업환경 개선, 블랙리스트 철폐 등이 함께 제기됐다.

1989년 현대중공업은 구사대 충돌 상징적 현장
이처럼 노동조합과 파업이 급격히 확산되면서 기업들이 대응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관리직과 경비인력 등을 중심으로 파업에 대응하는 인력이 만들어졌다. 그들을 ‘구사대’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구사대와 노조는 공장 정문을 누가 장악하느냐, 생산라인을 누가 통제하느냐를 두고 갈등이 빚어졌고, 때로는 물리적 충돌도 이뤄졌다.
특히 구사대 중 일부는 외부 용역인력이기에 그 폭력성이 잔인했다. 이에 구사대에 대한 소문은 빠르게 전국적으로 퍼져 나갈 수밖에 없었다.
1989년 2월 울산 현대중공업에서는 조업 문제를 둘러싸고 노동자들과 회사 측 인력이 충돌했다. 당시 언론은 경비원과 관리직 사원 등으로 구성된 약 500명의 구사대가 조업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회사 진입을 막는 과정에서 충돌이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구사대라는 용어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고, 이에 민중가요에서도 ‘구사대’라는 단어가 들어가기 시작했다. 실제로 김호철의 ‘파업가’에는 구사대의 폭력을 물리친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단결투쟁가’에서도 백골단과 구사대가 노동자들의 투쟁을 가로막는 존재로 함께 등장한다.
구사대라는 단어가 신문기사나 노동운동 문건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수많은 노동자와 대학생이 함께 부르던 노래 속으로까지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 대학가나 노동현장을 경험한 세대에게 구사대는 사전에서 뜻을 찾아야 하는 단어가 아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