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리뷰] 11월 2일 벨푸어 선언, 팔레스타인 미래는 과연
[역사속 오늘리뷰] 11월 2일 벨푸어 선언, 팔레스타인 미래는 과연
  • 어기선 기자
  • 승인 2026.11.02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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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내용 바탕으로 만든 AI 생성 이미지./사진=파이낸셜리뷰 DB
기사 내용 바탕으로 만든 AI 생성 이미지./사진=파이낸셜리뷰 DB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17년 11월 2일은 벨푸어 선언이 있었던 날이다. 아서 벨푸어 영국 외무장관이 영국 유대인 사회 유력인사인 월터 로스차일드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에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을 건설하는 것을 지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훗날 이스라엘 건국의 중요한 외교적 토대로 평가되는 ‘벨푸어 선언’이다.

선언은 짧았지만 그 영향은 오래 이어졌다. 유대인 민족운동에는 강대국의 공식적인 지지였고, 팔레스타인의 아랍인에게는 자신들이 거주하는 땅의 미래를 외부 세력이 결정하는 문제였다.

오스만제국 영토의 행방은

팔레스타인은 당시 오스만제국 땅이었다. 그런데 19세기말부터 시오니즘이 유럽을 강타하면서 유럽 등지에서 유대인의 이주가 이어졌다.

그런 상황에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과 오스만제국은 적국이었다. 영국의 입장에서는 전후 처리 문제가 남아있었다.

그리고 벨푸어 선언은 영국이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 건설을 지지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그러면서 팔레스타인의 기존 비유대인 공동체가 가진 시민적·종교적 권리를 해쳐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붙였다. 다른 나라에 거주하는 유대인의 권리와 정치적 지위도 보호 대상으로 명시했다.

그러나 독립국가의 수립을 직접 약속하지는 않았다. 국경과 주권, 정부 구성도 정하지 않았다. ‘민족적 고향’이라는 표현은 구체적인 정치체제를 확정하지 않은 채 서로 다른 해석의 여지를 남겼다.

권리를 규정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었다. 유대인은 민족적 고향을 건설할 주체로 등장했지만, 현지 아랍인은 ‘비유대인 공동체’로 표현됐다. 이들의 시민적·종교적 권리는 언급하면서 정치적·민족적 권리는 명시하지 않았다. 다수 주민의 자결 요구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는 해결되지 않았다.

벨푸어 선언 이후

전쟁이 끝나고 1922년 국제연맹이 팔레스타인 위임통치 등을 다루면서 벨푸어 선언이 적극적으로 반영됐다.

이후 유대인의 이주와 공동체 건설, 아랍인의 독립 요구가 충돌했다. 나치의 박해는 유대인에게 피난처 확보를 더욱 절박한 과제로 만들었고, 아랍인들은 정치적 주도권과 생활 기반을 잃을 가능성을 우려했다.

결국 벨푸어 선언이 오늘날 팔레스타인 갈등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같은 땅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살아가는 두 민족이 충돌을 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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