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를 남겼다.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고 의심한다는 사실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는 의미를 담는다.
그런데 20세기 후반 미국의 한 예술가는 이 철학적 명제를 갖고 작품을 만들었다. 바로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I Shop Therefore I Am).’다.
이 작품은 1987년 발표한 작품으로 소비행위가 인간의 정체성과 사회적 지위를 규정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봤다는 평가가 있다.
쇼핑이 인간의 존재를 증명하는 시대
크루거의 작품은 붉은색 사각형 안에 흰색 글씨로 문구를 배치한 단순한 형태이지만 현대 소비사회의 특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작가는 광고와 대중매체에서 익숙하게 접할 수 있는 시각적 표현을 활용해 소비문화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과거에는 직업이나 가족, 공동체에서의 역할 등이 개인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중요한 요소였으나 대량생산과 대중소비가 확대되면서 사람들이 구매하고 사용하는 상품 역시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자동차와 의류, 시계, 가방 등은 본래 이동하거나 시간을 확인하고 물건을 보관하기 위한 상품이다.
하지만 같은 기능을 수행하는 제품이라도 어떤 브랜드의 상품인지에 따라 가격과 사회적 평가가 크게 달라진다.
상품의 실용적 기능을 넘어 브랜드가 가진 이미지와 상징성이 소비자의 구매 결정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소비문화가 빠르게 확산한 시기
크루거가 작품을 발표한 1980년대 미국은 소비문화가 빠르게 확산되던 시기였다. 텔레비전 광고와 패션산업, 대형 유통업체 등이 성장하면서 기업들은 상품의 기능뿐 아니라 브랜드가 상징하는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판매하기 시작했다.
자동차 광고는 이동수단의 성능을 넘어 성공한 삶을 보여줬고, 화장품 광고는 아름다움과 자신감을 강조했다. 의류와 패션 광고 역시 특정 상품을 구매하면 소비자가 원하는 사회적 이미지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기업들은 소비자의 욕구를 자극하기 위해 상품과 개인의 정체성을 연결하는 마케팅 전략을 활용했다.
이 과정에서 소비자는 단순히 필요한 물건을 구매하는 사람을 넘어 브랜드가 제시하는 생활방식과 이미지를 선택하는 존재가 됐다.
크루거는 광고에서 사용되는 강렬한 문구와 시각적 표현을 자신의 작품에 차용했다. 광고가 소비를 권유하기 위해 사용하는 형식을 오히려 소비사회를 비판하는 도구로 활용한 것이다.
1987년의 질문,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크루거가 작품을 발표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소비와 정체성의 관계는 더욱 복잡해졌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의 확산으로 소비자들은 자신이 구매한 상품과 경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실시간으로 보여줄 수 있게 됐다.
고가의 자동차와 명품뿐 아니라 여행, 음식, 취미활동 등도 온라인에서 개인의 생활방식과 사회적 이미지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기업들 역시 소비자의 취향과 행동을 분석해 개인에게 맞춤형 광고를 제공하고 있다. 과거 대중매체를 통해 전달되던 소비 메시지가 이제는 개인의 관심사와 구매 이력에 따라 정교하게 전달되는 것이다.
물론 소비 자체가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하는 행위는 개인의 필요를 충족하고 기업의 생산과 고용을 유지하는 경제활동의 중요한 부분이다.
문제는 소비가 인간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작용할 때 발생한다. 어떤 물건을 소유하고 있는지가 개인의 능력이나 사회적 지위를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면 소비는 필요를 충족하는 행위를 넘어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는 수단으로 변할 수 있다.
크루거가 1987년 남긴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문장은 바로 이러한 소비사회의 모순을 드러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