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병훈 칼럼] 다누리호의 감동과 에피 아줌마 농장의 추억
[백병훈 칼럼] 다누리호의 감동과 에피 아줌마 농장의 추억
  • 백병훈
  • 승인 2022.08.09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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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 한국 최초 달 궤도탐사선 다누리호(KPLO)가 성공적으로 발사되어 년 말을 목표로 긴 항해에 들어갔다. 우주를 향한 장쾌한 발걸음이다. 금년 6월 국산 발사체에 몸을 실은 지구궤도위성 누리호의 성공에 이어, 년 말에 달 상공 궤도에 안착해 임무를 수행할 다누리호의 성공은 한국 우주항공 역사의 원년으로 기록될 것이다.

비상하는 한국 우주항공기술

대한민국 우주개발의 역사는 1992년 최초의 인공위성 우리별 1호를 유럽우주국(ESA)이 사용하던‘아리안4호’로켓을 빌려 발사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한국은 다양한 명칭의 위성발사체 로켓분야 실험을 거쳐 금년 6월 누리호 위성을 700Km 고도에 안착시키는데 성공했다.

이로서 한국은 러시아, 미국, 프랑스, 중국, 일본, 인도에 이어 1톤 이상 무게의 위성을 자국 영토 안에서 쏘아 올려 우주궤도에 안착시키는 7번째 나라가 됐다. 짧은 기간 한국이 여기까지 왔다.

이번 다누리호는 예정된 궤적을 따라 장기간의 여정에 나섰고 금년 마지막 날, 달 상공 100Km 궤도에 진입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우주강국들의 달기지 건설과 우주자원 확보를 위한 치열한 경쟁 속에서“달 관측의 새로운 지평을 열 장비”라고 평가 받는 다누리호 탑재장비가 수행할 임무들은 우주주권 확보를 위한 한국의 바람직한 선제적 조치다.

그러나, 다누리호의 성공적 발사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다누리호를 하늘로 쏘아 올린 로켓이 ‘스페이스 X’사의 “팰콘9 블록5”로켓이라는 사실이다. 결국 6,200만 달러(한화 약 700억 원) 상당의 재사용 가능한 외국 로켓을 빌려 다누리호를 우주로 올려 보낸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보다 안정적이고 보다 무거운 중량의 위성을 쏘아 올릴 수 있는 발사체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따라서 다누리호가 여기까지 오기까지의 모든 과정과 수고스러운 노력들이 말해주는 것은, 한국도 강력한 추력을 갖는 더 혁신적인 “로켓”을 만들라는 주문이고, 그 형식은“액체로켓”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인간의 우주를 향한 끝없는 욕망은 강력한 발사체의 등장을 이미 예고해 놓고 있었다. 96년 전 미국의 어느 작은 마을 농장 들판에서 그 예고는 감격 속에서 조용히 선포되었다.

에피 아줌마 농장에서의 고다드 박사

1903년“우주항해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러시아의 수학자 치올콥스키가 최초로 로켓이론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는 뉴턴의‘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을 이용하면 진공상태의 우주를 항행할 수 있다고 논구했다. 6년 뒤 미국의 어느 과학자가 액체수소를 연료로, 산소를 산화제로 사용하는 액체로켓의 가능성에 대한 글을 썼다. 이 사람이 바로 미국 출신의 고다드(Robert Goddard: 1882-1945) 박사이다.

이윽고 1926년 3월 16일, 매사추세츠주 우스터 카운티의 작은 마을 오번에 있는 에피(Effie) 아줌마 농장 들판은 현대 항공우주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역사의 현장이 됐다. 고다드 박사가 역사상 최초로“액체로켓”을 쏘아 올린 것이다. '네루’라는 이름의 그 로켓은 조잡했지만 2.5초 동안 56m를 치솟아 올라갔고, 현대 액체로켓의 기본원리를 모두 갖추었다. 드디어 인류의 우주를 향한 길이 열린 것이다.

그날의 놀라운 사건을 그는 일기에 "액체연료를 사용하는 로켓의 최초 비행은 어제 에피 아줌마의 농장에서 행해졌다."고 간결하게 기록했다. 짧은 기록이지만 그 속에는 인류가 우주를 향해 긴 항해의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는 의미를 충분히 담고도 남는 것이었다. 그는 이후 실험을 거듭해 1935년에는 음속을 뛰어 넘는 로켓을 쏘아 올렸다. 이것이 미래를 주도할 액체로켓의 위력이자 신화였다.

돌이켜 보면, 어린 시절 몸이 약했던 그는 침대에서 공상을 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가 사준 조지 웰스의 과학소설 ‘우주전쟁’은 그에게 가슴 설레는 충격으로 다가갔을 것이고 깊은 감명을 주었을 터이다. 그래서인가, 1899년 어느 가을날, 집 뒤뜰의 나무에 올라 화성까지 갈 수 있는 우주선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나무에서 내려올 때, 그는 결연한 각오에 불타는 새로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 날을 자신의‘기념일’이라고 부르며 해마다 일기에 기록했다.

고다드의 우주에 대한 열정은 고교 시절 ‘우주탐험’이라는 글을 과학잡지에 투고하도록 이끌었다. 그러나 현실성이 없다는 이유로 퇴짜를 맞았다. 위인들이 그러하듯 이처럼 고다드의 연구실적은 자신의 생애 동안 외면당하고 인정받지 못했다. 그의 이론은 조롱과 놀림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심지어 1920년, 고다드가 야심차게 발표한 논문 ‘초고공에 도달하는 방법’에 대해 <뉴욕타임스>는 진공상태에서는 로켓추진이 불가능하다며 가차 없는 비판을 때렸다. 그런데, 1969년 아폴로11호가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하기 바로 하루 전날, 이 신문은 49년 전 자신들이 발표한 고다드에 대한 사설을 철회하고 뉴턴의‘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을 잘못 해석했던 것을 후회한다는 사설을 발표했다. 늦었지만 마땅히 그렇게 됐어야 할 일이었다. 위대한 역사의 반전이 아닐 수 없었다.

고다드는 살아생전 인간의 로켓이 지구 대기권을 벗어나 우주로 날아가는 화염 불꽃의 눈부신 장관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사후 그의 불멸의 업적은 크게 재평가되었고 그는 “로켓의 아버지”가 됐다.

그가 남긴 항공우주공학의 기술적 유산은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로 우주시대를 연 러시아의 세르게이 코롤료프, 인간 최초로 달 착륙을 실현시킨 새턴로켓의 독일 출신 베르너 폰 브라운, 남아공 출신의 미국 기업가 스페이스X사의 일론 머스크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날 있었던 에피 아줌마 농장의 추억스런 감동은 훗날 대한민국의 다누리호로 이어졌던 것은 아닐까?

백병훈 약력

건국대학교 비교정치학 박사

국가연구원 원장

프라임경제신문 사장

한국정치심리공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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