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병훈 칼럼] ‘여정공주’의 말 폭탄과 푸에블로호
[백병훈 칼럼] ‘여정공주’의 말 폭탄과 푸에블로호
  • 백병훈
  • 승인 2022.11.29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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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 ‘여정공주’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여동생 김여정(金與正)을 부르는 애칭이다. 그런 가냘프고 여릴 듯한 ‘공주’가 스스로 ‘말 폭탄’이라고 표현하는 험한 막말 시리즈를 이어가고 있다. 그는 북한의 국무위원, 당 중앙위 선전선동부 부부장, 정치국 후보위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란 직함을 달고 대남⸱대외 부문을 총괄하고 있다. 그의 위세 당당한 처신을 감안하면 막말 시리즈에는 뭔가 특별한 의도가 있을 법하다.

김여정의 거친 언사는 곧 김정은 위원장의 심사(心思)와 다를 것이 없을 터인데 도대체 그 의도는 무엇일까? 아마도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에 대한 분풀이, 절박함에 대한 은밀한 호소, 또는 대남 응징에 대한 자심감일 수도 있다. 그는 2년 전, 대북전단 살포에 대해 말 폭탄을 쏟아내고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시켰다.

그런 그가 한국의 전, 현직 국가원수를 “삶은 소대가리, 겁먹은 개, 머저리, 그 인간 자체가 싫다”며 극언하고 경멸했다. 당국자들에게는 “미친 놈, 쓰레기, 혐오스러운 것들, 천치바보들, 들개에 불과한 남조선 것들”이라고 몰아붙였다.

이윽고 “보다보다 이제는 별꼴까지 다 보게 됐다”고 일갈했다. 이런 김여정의 거친 언어공세는 김정은 위원장의 정치심리전 일환이다. 그러므로 긴장과 충돌 가능성이 높은 남북관계에서는 상대방이 보내는 “신호”를 영민하게 알아차려야 한다.

그리고, 역사에는 “기연(奇緣)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우연한 기회와 인연으로 문제가 풀릴 수 있다는 뜻이다. 국제 세력관계의 각축장에서 신축성과 유연성은 우연찮은 결실을 얻어낼 수 있다. 이미 북한은 핵무력을 법으로 명문화하고 핵보유국임을 공개적으로 밝힌 상황이다. 미국과 북한의 자존심을 충족시키면서 한국이 국가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신호를 잘 파악하여 신축적이고 유연한 전술을 구사해야 한다. 이것이 “외교방략”이다. 그렇다면, 그 카드 중의 하나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푸에블로호”(Pueblo號)이다.

54년 전 북한이 강제로 피랍해간 푸에블로호를 미국으로 반환하는 일이다. 1968년 1월 23일, 미 해군과 국가안보국 요원, 민간 해양학자 등 83명을 태운 미 첩보수집함 프에블로호가 동해 공해상에서 북한 해군함정과 미그기들에 의해 나포됐다. 미국 측은 부인했지만 영해 불법침범 혐의였다. 이후 수십 차례의 미⸱북 비밀협상을 통해 사건 발생 11개월 만에 승조원 82명과 유해 1구가 송환됐다.

나포된 푸에블로호는 30년 뒤, 원산항으로부터 대동강변으로 옮겨졌다. 19세기 초 조선이 격침시킨 제네럴셔먼호 “격침 기념비” 바로 옆에 갖다 놓는 영악함을 보였다. 대미항전 적개심 고취를 위한 교육용으로 지금도 운용하고 있다. 이처럼 푸에블로호는 국제법상 여전히 나포 상태로 남아있는 유일한 미 해군 선박이다.

그래서 미국은 북한에 푸에블로호 반환을 꾸준히 요구 해왔다.

2007년에는 반환을 요구하는 결의안이 미 상원에 재상정됐다. 미 공화당 스콧 팁턴 하원의원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푸에블로호 반환문제를 협의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푸에블로호가 이제 본국으로 돌아올 시간이 됐다”고 말했다고 한다. 작년 2월에는 귀환 승조원들과 유족들이 억류 당시 고문과 가혹행위, 정신적 학대를 당했다고 소송을 제기하여 미 연방법원으로부터 북한은 23억 달러(약 2조 5,800억원)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아 내기도 했다.

사실, 푸에블로호사건은 미국의 입장에서는 두 차례의 가슴 아픈 치욕이다.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널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조선과의 통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거절당하자 대포와 소총공격을 퍼부어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에 평양 관민(官民)들이 들고 일어나 제너널셔먼호에 포격을 가하고 불을 붙여 침몰시켰다. 승조원 대부분도 처형당했다. 이 사건으로 애국심과 자존심이 남다른 미국이 크게 상처를 받았다. 푸에블로호 사건으로 미국은 한반도에서 100여년 만에 또한번 굴욕을 당해야 했다. 해군함정이 공해상에서 납치된 것은 미 해군역사상 106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입장에서 미국과의 관계개선은 생존에 직결된 문제이다.

이 문제의 아킬레스건을 미국이 쥐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북한의 손에 있다. 북한의 핵위협과 미사일 불꽃놀이에는 나름의 절박함이 묻어있다. 김여정의 말 폭탄 시리즈가 이를 암시한다. 놀랍게도 북한은 2002년 제2차 북핵위기 직전 푸에블로호를 미국에 반환할 것을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그러므로 반환 가능성은 아직도 남아있다. 김정은 위원장의 결심이 필요하다. 남에게 베풀어 손해나는 일은 세상에 없다. 돌아오는 선물이 더 클 것이다. 만약, 푸에블로호가 반환된다면 김여정이 대표단장 자격으로 방문할 수 있도록 미국이 초청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지나간 폐허의 역사가 그 책임을 오늘에 묻지 않는다. 북한은 하루하루를 고군분투하고 있다. 북한이 국제법의 정신을 살려 푸에블로호를 반환한다면, 그것은 북한이 새로운 생존의 길을 선택했음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언제까지 굶주린 병사와 인민들을 이끌고 혁명가를 불러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김정은 위원장을 설득시킬 수 있는 사람 중의 하나는 혹시 그가 각별히 사랑하고 아낀다는 “여정공주”는 아닐까?

백병훈 약력

비교정치학 박사

한국정치심리공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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