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준 칼럼] 중공군 정율성 영웅화와 한국전쟁에 대한 성찰
[정인준 칼럼] 중공군 정율성 영웅화와 한국전쟁에 대한 성찰
  • 정인준
  • 승인 2023.08.31 14: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파이낸셜리뷰] 6.25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2년간의 휴전 협상 끝에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었으나, 김신조 특수부대 서울침투(1968.1.21), 판문점 도끼만행(1976), 연평해전(1999, 2002), 연평도 포격 및 천안함 피격(2010) 등 지난 70년간 북한의 정전협정 위반(43만건)으로 남북한 간 긴장된 군사적 대치 상황은 지속되어왔다.

그러나 한국이 세계 10위권 경제 강국으로 발전하고, 북한은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독재국가로 남아있어 결국 정전협정의 승리자는 한국이라고 평가되기도 하는데, 이런 이유로 우크라이나 전쟁에 한국모델을 구상하는 국제정치학자도 있다.

금년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아 한국정부는 전쟁 중 희생된 유엔군을 추모하고 핵 및 미사일 개발을 하는 북한의 안보 위협에 한미동맹 강화 등 강력 대응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전쟁 재발 방지를 강조한 반면, 북한은 전승일이라는 명칭 하에 러시아 국방장관과 중국 대표단이 참석한 열병식과 축하공연을 개최하는 등 북한주민의 내부결속과 함께 북한·중·러 3국 연대를 강화한 바 있다.

윤석렬 대통령은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온 우리나라는 “세계시민의 자유 평화 번영에 책임을 지고 기여해야 하는 역사적 숙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지난 8월18일 캠프 데이비드에서 개최된 한·미·일 정상회의에서 북한의 “핵 선제 타격” 위협과 중국의 대만 무력통일 모험에 사전 대응하는 한반도와 인도·태평양 지역에서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한·미·일 3국 협력강화(정신, 원칙, 공약 등 3개 문서 채택)로 구체화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식민지 노예상태에서 독립시켜야 할 나라” (1943.12 카이로 선언)와 “강대국에 의한 분할점령 및 신탁통치 대상” (1945.2 얄타회담)이었던 약소국가 한국은 지난 6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개최된 나토정상회의에 호주·뉴질랜드·일본과 함께 아시아 전략 파트너 국가로 초청되었다. 이는 한국의 외교·안보적 역할이 한반도를 뛰어 넘어 글로벌 질서에 기여할 만한 역량과 가치를 가진 자유민주주의 선도 국가로 발돋움한 것을 의미한다.

최근 광주시가 추진 중인 ‘정율성(鄭律成) 역사공원’은 1945년 해방 이후 좌우익 이념 혼란과 함께 1950년 10월 중순 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으로 한반도에 유엔에 의한 자유민주주의 통일국가 실현이 좌절된 과거사를 떠 올린다.

광주태생인 정율성은 한국전쟁 중 중공군이 사기 진작을 위해 가장 많이 부른 ‘인민해방군 행진곡(팔로군 행진곡)’ 등 군가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1951년 유엔군의 1.4후퇴 시 서울을 점령한 중공군 일원으로 ‘조선궁정악보 ’등 문화재를 약탈했던 사람이다 (한·중국교정상화 이후인 본인 사망 후 부인이 반환). 광주시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은폐한 채 중국으로 건너간 항일운동가 겸 음악가로 추앙해 역사공원을 만들어 광주의 시민, 학생들에게 개방하겠다고 한다. 중국의 공자학원이 언어교육과 함께 시행해온 공산주의 선전교육을 국민의 세금을 들여 합법적으로 앞장서서 시행해 주겠다는 것이다.

이는 북한이 3세대를 이어 한반도 공산화 야욕과 통일전선전략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엄중한 안보환경을 도외시하는 친중 정치인의 안일한 발상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중국은 한국전쟁을 “항미원조(抗美援朝)”라며 미제국주의자 침략에 대응하여 북한을 지원해 승리한 전쟁으로 왜곡하고 있다.

1949년 중국 내전을 승리로 이끈 마오쩌둥(毛澤東)은 1950년 5월15일 김일성과 회담, 스탈린이 승인한 김일성의 남침을 지원하기로 약속했으며,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유엔군에 의해 북한군이 격퇴되고, 1950년 10월7일 유엔총회 결의에 의해 유엔군이 38선 이북으로 진격하자, 이를 미국의 침략이라며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과 중국은 한국전쟁을 내전이라고 말하면서 전쟁 책임을 회피하고 있으며, 한국 좌파도 중국 및 북한과 같은 입장을 갖고 있다.

한국전쟁의 성격은 미·소·영. 프랑스, 중국 등 세계 강국들이 모두 참가한 국제전쟁으로, 한반도에 국한되어 제한전쟁을 벌인 세계대전으로 규정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1951년 4월 트루먼 대통령은 중국 본토 공격 등 확전을 주장한 맥아더 장군을 해임함으로써 소련 및 중국과의 군사적 충돌에 의한 제3차 세계대전을 방지한 측면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스탈린을 전후 세계평화 질서 확립(국제연합 창설)을 위한 협력파트너라는 ‘관용적 대소련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이 모스크바를 침공한 나치 독일군을 쫓으면서 점령한 폴란드, 체코 등 동유럽 국가들을 공산화하는 팽창야욕을 보이면서 루스벨트의 스탈린에 대한 신뢰는 오판으로 판명되었다.

스탈린은 1946년 2월9일 연설에서 “소비에트 사회제도로 나치와의 전쟁에서 승리했고, 세계 자본주의는 위기와 전쟁의 파국을 통해 발전한다며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평화공존 할 수 없다”는 공산주의자로서의 신념을 확실히 표명하였다. 미국은 트루먼 대통령이 1947년 3월12일 의회연설에서 그리스·터키에 대한 원조승인을 요청하는 대외정책 노선-트루먼 독트린 선언을 통해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공산주의 위협으로 부터 방어하고 소련의 공산주의 팽창을 “봉쇄”하는 정책으로 전환하면서 미·소 냉전(cold war)이 시작된다.

최초의 냉전 충돌은 그리스 내전(1946-1949)이며, 한국전쟁은 미·중이 직접 군사적으로 충돌한 냉전의 두 번째 사례가 된다. 유엔군에 의한 전쟁의 승리가 임박했던 것처럼 보였던 1950년 9월 가을날 이승만 대통령이 종군기자이던 마거리트 히긴스(뉴욕 헤럴드 트리뷴 도쿄특파원)에게 말한 공산주의자에 대한 분석은 매우 예리하다 :

“이번에 우리가 학습했듯이 미국 정부도 공산주의자들과의 타협은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을 배워야 합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타협이란 언제나 시간을 벌기위한 수단이자, 상대가 의심하지 않도록 달래는 속임수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의 속셈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당신네는 준비가 너무 늦어져서 그들의 다음 번 공격을 막아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문재인 정부가 5년간 대외에 천명해온 ‘북한의 비핵화 신뢰’와 중국 공산주의자와의 협력을 통한 한반도 평화유지 정책은 오판으로 판명되었다. 김대중 대통령 이래 북한이 변할 것이라고 믿는 ‘관용적 대북한 인식’의 오류를 수정할 때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