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의 역사] 대한증권거래소 설립에서 한국거래소까지
[부의 역사] 대한증권거래소 설립에서 한국거래소까지
  • 김진혁
  • 승인 2024.02.15 09: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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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가증권 발행은 공업화 토대자금

6.25 전쟁 후 가격이 급등한 지가증권

일본기업 인수로 재벌의 발판 이룬 SK, 한화, 두산 등

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파이낸셜리뷰] 정부는 해방 후 일본인 귀속재산을 민간에게 낮게 팔았다. 우리나라 초기 기업들은 이를 발판으로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선경(현 SK그룹 전신), 두산, 한화가 대표적이다.

1945년 해방 이후 현대적 증권거래소가 개설되기 전까지 우리 증권시장은 일부 대주주에게 편중된 부진한 거래였다. 유일하게 국채인 지가증권만이 거래되었다. 지가증권은 이승만 정부가 농지개혁법을 실시하면서 소작인에게 농지를 주고 지주들에게는 농지값을 보상해 주기 위해 발행한 최초의 정부 발행 공채이다.

16만 9천여 명의 지주에게 15억 2천 4백만 원에 해당하는 지가증권을 5년 분활 지급 조건으로 발행하였다. 정부가 대주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농지개혁을 강행한 이면에는 지주들이 토지를 내놓는 대신 보상금을 받아서 기업자본을 조성하여 공업화에 착수하기 위함이다.

우리나라는 1956년 3월 증권시장을 개설한 이후 주식 채권 파생상품 등 하루 평균 60조 원의 다양한 금융투자상품이 거래되는 국제적 자본시장으로 발전했다.

증권시장은 기업이 유가증권 발행을 통하여 장기적인 자금조달의 기능을 수행하고, 개인에게는 금융자산투자를 통해 재산증식의 기회를 제공한다. 따라서 증권시장은 국가 경제에 혈액을 공급하는 심장과 같은 역할을 한다. 대한증권거래소는 전후복구와 경제부흥을 위한 투자재원의 조달을 위하여 서울 명동에 설립하고 12개 종목을 상장하면서 거래를 시작했다.

당시 거래 방식은 집단경쟁매매 방식인 ‘격탁매매’로, 벽돌 모양의 나무토막 ‘딱딱이’를 탁자에 내리쳐 가격을 알리는 방식이었다.

주식분산이 되어 있지 않아 건국국채(建國國債)의 매매를 중심으로 하는 국공채시장이었다. 1962년 경제개발계획 수립에 따라 개발자금 마련을 위해 ‘증권거래법’이 제정과 주식회사제로 개편됐다.

1965년 5월 ‘증권파동’으로 증권시장에 대한 불신이 늘자 동년 5월 정부 출자를 받아들여 대한증권거래소를 ‘한국증권거래소’로 개칭한 뒤 증권시장 공신력을 높이는 데 주력했다. 1971년 청산거래제 대신 보통거래제를 도입했으며 1975년 격탁(딱딱이) 및 손짓을 대신해 포스트 매매제와 전자식 시세 게시판을 등장시켰다.

ㅇ증권거래소: 공정한 가격 형성 및 유통 역할

증권거래소는 주식이나 채권 등 유가증권의 공정한 가격 형성과 안정 및 유통의 원활을 기하고 공신력을 높이기 위하여 설립된 공영제 조직의 특수법인이다.

2005년 1월 27일에 한국증권거래소와 한국선물거래소, 코스닥증권시장(주), 코스닥위원회가 합병되어 한국증권선물거래소가 새롭게 출범하였다. 이후 2009년 2월 4일에 한국증권선물거래소가 한국거래소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본사는 부산광역시에 있다.

1985년 시가총액방식의 종합주가지수(KOSPI) 제도가 도입돼 100포인트로 출발해 1989년 처음으로 1,000포인트를 돌파했고 2007년 2,000, 2021년 6월 7일, 개인 매수세에 힘입어 3,305.21로 한국 경제성장과 함께 발전하고 있다.

향후 국내증시의 전망은 코스피 PER(주가수익비율)가 역사적으로 8.7~13.8배 사이에서 움직였는데, 2024년 예상 실적 대비 코스피 PER은 9배 수준으로 국내증시가 저평가됐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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