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의 역사] 깡통 계좌 정리와 IMF 사태
[부의 역사] 깡통 계좌 정리와 IMF 사태
  • 김진혁
  • 승인 2024.02.29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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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픽사베이
사진=픽사베이

[파이낸셜리뷰] 1980년대 한국경제의 3저가 끝나자, 깡통 계좌 정리 및 국가 외환부도인 IMF 사태가 이어졌다. 한마디로 고난의 시기를 겪어야만 했다.

ㅇ 1990년 1차 깡통 계좌 정리

1980년대는 화려한 증시 랠리가 있었다. 1985년부터 1989년 초까지 종합주가지수가 6~7배 상승했다. 1985년 플라자 합의로 엔화가 초강세로 기울면서 원화 약세 속에 한국 수출에 모멘텀이 발생됐다.

70년대 중후반과 80년 초에 비해 낮아진 저유가, 저금리가 엮이면서 3저 시대 호황을 이끌었다. 그리고 86년 서울 아시안게임, 88년 서울 올림픽 속에 소위 ‘트로이카주’라 불리던 은행, 무역, 건설업종이 질주하면서 주가는 계속 상승했다.

80년 후반기까지 증권사에 다닌다고 하면 모두 부러워했었던 기억이 난다. 서울상대 졸업생들 취직 1순위가 증권사였다. 증권회사는 이익이 나서 매달 보너스를 지급하기도 했다.

상상 이상의 상승률로 인해 당시 투자자들은 당연한 듯 신용융자를 사용했다. 심지어 신용융자를 안 쓰는 투자자들을 못난이 취급하였을 정도였다. 산이 높으면 골도 깊다.

1989년 중반부터 하락한 주가는 90년 초 주가지수 30% 수준의 하락을 만들면서 시장에서 ‘깡통 계좌’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한다.

80년대에는 신용융자 계좌가 단기 주가 하락으로 증거금이 부족해지더라도 조금 버티면 다시 상승하였기에 관행적으로 깡통계좌를 묵인하였다.

그런데 1989년부터 증시가 1년 반 조정장이 지속되고 조정폭도 주가지수 기준 -20~-30%에 이르니 깡통 계좌는 급격하게 증가한다. 계속 깡통계좌가 누적되는 상황 속에 자칫 금융시스템에 큰 문제가 될 수 있기에 1990년 10월 10일 당시 금융 당국은 전격적으로 담보유지 비율 100% 미만의 깡통 계좌를 일괄반대매매하기에 이른다.

당시 정리 대상 계좌수는 1만3천여 계좌에 금액은 3천억으로 추정되는 엄청난 규모였다. 이 과정에서 주가지수는 500p까지 하락했고 서울 시민의 한 집 건너 한 집씩 주식투자로 큰 손실을 보았다. 깡통 계좌의 투자자들이 객장에 난입해 기물을 부수기도 했다. 동료 한 사람은 조폭 자금을 관리했는데 물어내라는 시달림에 그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도 목격했다.

그 당시 서글픈 이야기가 회자하였다. 깡통 계좌 사건 이후 한 직원이 선을 보았다. 장모될 분이 “자네 직장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에 계면쩍게 “조그만 회사에 다닙니다”라는 거짓말을 했다.

장모가 하는 말이 “작은 회사면 어떤가, 증권사만 아니면 되지’라고 말할 정도로 증권투자에 대한 불신이 최고조였다.

당시 88년 이후 국민주 열풍도 있었기 때문에 전 국민이 주식투자를 알던 시기였던지라, 실질적으로 "주식투자 패가망신"이라는 고정관념이 자리하게 됐다. 1992년까지 계속 깡통계좌 정리가 이어지면서 개인투자자들에게 큰 상처로 남았다. 증권사 경영도 주식시장의 호불 황에 따라 춤추는 미숙한 시장이었다.

ㅇ 국가 부도 IMF 사태

97~98년 찾아온 IMF 사태는 대한민국 전체를 뒤흔들었다. 경제, 사회, 가정 모두에 악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주식시장도 대폭락 장을 피할 수 없었다.

94년에 1145p에 있었던 주가지수가 1998년 277p까지 1/4 수준으로 하락하였다. 개별 종목에서는 상장폐지와 파산은 IMF 사태 속에 셀 수 없이 이어졌고, 당시 투자자들은 심각한 투자손실을 겪게 된다. 1980년대 잘 나가던 동서증권, 고려증권, 쌍용투자증권, 장은증권 등 외환위기 직격탄 맞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것은 증권사가 호황기에 과잉투자를 하거나 전략상 오류를 저지르면서 리스크 관리에 충실하지 못한 결과이다. 기업들 줄도산, 금융회사 파산, 구조조정, 대규모 정리해고, 비정규직 양산, 금융 불안 등 한국경제 근간이 뒤흔들렸다.

IMF의 계획에 따라 한국에서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기업(대우그룹, 한보그룹, 삼미그룹, 기아그룹, 진로 등)과 은행마저도 무너졌다. 1998년 6월 금융감독위원회는 대동·동화·동남·경기·충청은행 등 5개 은행의 퇴출을 발표했다. 외환위기 당시 약 9만 명의 금융인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무분별한 기업 대출과 외환위기가 초래한 은행 구조조정은 2006년까지 멈추지 않았다. 외환위기 직전 16개 은행원도 3명 중 1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소위 ‘은행 불패’의 신화가 무너진 것이다. 은행업의 대명사로 자리잡은 '조상제한서'(조흥, 상업, 제일, 한일, 서울)가 수년 만에 일장춘몽으로 끝난다.

제일은행은 직원 약 4000여 명을 감원하고 지점 48개를 폐쇄했다. 당시 홍보팀에서 일했던 이응준씨가 폐쇄 직전 테헤란로 지점 직원들의 모습을 담은 영상 ‘눈물의 비디오’는 지점 통폐합과 인력 구조조정으로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게 된 은행원들의 심정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당시 27개였던 은행 중 14개가 사라졌다. 정부는 헐값에 은행들을 해외에 매각하고 통폐합시켰다.

대우채권의 부실화로 2000년 한빛, 평화, 광주, 경남은행 등 새롭게 독자 회생 불가 판정을 받은 은행이 속출했다. 이들 4개 은행을 효과적으로 흡수하기 위해 2001년 4월 지주회사인 우리금융지주를 설립했다. 상업은행, 한일은행 한빛 은행 평화은행은 우리은행에 합병당한다.

구조조정이 일단락되면서 선도 은행을 선점하려는 대형화 전쟁도 불붙기 시작했다. 2001년 국민은행은 주택은행을 흡수합병하여 ‘메가뱅크’시대를 예고했다. 서울은행, 충청 보람은행 등은 하나은행으로 넘어갔다. 조흥은행은 2003년 신한금융지주에 팔렸다. 109년 최고 역사의 ‘조흥’ 간판은 영원히 사라졌다.

1990년대 후반에는 투자신탁회사가 몰락했다. 1980년대 저달러, 저유가, 저금리의 이른바 3저 속에서 해외원유, 외자, 수출에 크게 의존해 경제발전을 계속해온 한국은 의외의 호기를 맞았다. 이런 3저 호황 속 전성기를 누렸던 한국투자신탁·대한투자신탁·국민투자신탁은 1989년에 첫 위기를 마주했다. 이들은 급락하는 코스피를 방어하려는 정부의 주문대로 주식을 쓸어 담는 시장 개입에 나섰으나 야속하게도 주가는 계속 하락했다.

이 사태로 자기자본을 까먹은 3대 투자신탁회사는 환매 요청이 빗발쳤던 외환위기라는 높은 파도를 결국 넘지 못했다. 그런 펀드 업계도 5년의 암흑기를 거친 뒤에 미래에셋이 주도한 펀드 열풍의 시대를 맞아 부활했다.

이후에도 금융투자업계와 금융투자협회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20년 팬데믹 위기 등을 겪었다. 하지만 오늘날 금융투자산업은 주식시장 시가총액 2천400조원·자산운용시장의 순자산총액 1천500조 원이라는 성과를 달성했고, 금융 선진국 못지않은 혁신적인 금융 투자서비스를 다수 선보였다.

지금은 냉혹한 대내외 경제환경과 더불어 해외 대체투자 손실과 국내 부동산 PF 손실, 기업공개(IPO) 시장 침체, 각종 금융사고가 업계와 협회의 고민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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