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의 역사] 1958년 국채파동, 채권시장의 흑역사
[부의 역사] 1958년 국채파동, 채권시장의 흑역사
  • 김진혁
  • 승인 2024.03.15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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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권사 1번 대한증권

건국국채 파동으로 일반인 외면

한국은행 통화안정증권으로 대체

[파이낸셜리뷰] 한국 자본시장은 1949년 최초의 증권회사인 대한증권이 설립된 이래 눈부신 성장을 이뤄냈다. 첫 고난은 국채파동이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10주년을 맞은 1958년 1월 16일 거래소 시장 개장 이후 처음으로 결제 불능 사태가 발생했다. 재무부 장관은 “전날 국채 거래를 모두 무효로 한다”라고 발표했다. 이른바 ‘1ㆍ16 국채파동’이었다. 1ㆍ16 국채파동은 승자와 패자도 없는 소모전에 불과했으며, 공신력이 생명인 자본시장에 큰 상처만 남긴 채 일단락됐다. 증권업계 자금난은 더욱 심화됐고 투자자들은 한동안 자본시장을 외면했다.

1945년 8.15 광복으로 독립한 대한민국은 미군정 시기에는 통치 자금을 한국은행 차입금을 통해 조달하였지만, 이는 재정적자가 누적되는 부작용을 유발했다.

정부에서는 재정적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듬해인 1949년 12월 19일 국채법을 제정했고 1950년 2월 23일 7200만 환 규모의 건국국채를 발행했다.

하지만 동년 6월 25일 6.25 전쟁이 발발하자 정부에서는 국군 양병 및 군수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건국국채를 대량으로 발행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건국국채의 가치하락을 불러왔으나 1953년 6.25 전쟁이 휴전되고 사회가 안정을 되찾으면서 건국국채는 서서히 가치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57년 재무부에서 두 가지 법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는데 하나는 외환거래 관련 세금을 부과하는 외환특별세법안과 제11회 건국국채 발행안이었다.

이 두 법안 모두 정부의 세수 충당이 목적이라 양쪽 법안이 동시에 통과될 확률이 낮았기 때문에 투자자들과 증권사를 비롯한 증권가에서는 어떤 법안이 통과될지를 두고 베팅하기 시작하였다.

건국국채가 발행될 거라고 예상한 쪽은 보유한 국채를 매도하였고 국채 미발행을 예상한 쪽은 국채를 매수해 물량 결집에 나섰다.

이후 정부에서 건국국채를 발행하지 않기로 결정하여 건국국채의 가격이 폭등하자 정부에서는 기존 결정을 뒤집고 건국국채를 다시 발행하면서 이로 인해 채권시장에 큰 혼란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1958년 1월에 들어선 국채가격은 매도세력과 매수세력의 공방전으로 인해 폭등과 폭락을 반복하였고 증권사들은 공매수와 공매도를 반복해 거래 규모를 부풀려 시장의 혼란을 키웠다.

이와 같은 혼란으로 인해 정부는 16일 자 건국국채 거래를 전면 무효화 하는 초강수 조치를 취했다. 대한민국의 채권시장이 초토화되어 자금이 주식시장으로 대거 이탈하면서 채권시장은 1980년대 초까지 발행 잔액 10조 원을 밑돌 정도로 암흑기에 접어들었고 1990년대 말이 돼서야 겨우 회복됐다.

또 국채에 대한 신뢰가 붕괴하면서 정부에서 재정적자 보전 재원 대부분을 한국은행과 해외 차입에 의존해야 했으며 대한민국 정부에서 공개시장운영을 할 때 국채를 쓰는 대신 한국은행의 통화안정증권으로 대신하게 된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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