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준 칼럼] 의료개혁 갈등으로 본 한국인의 물질주의 가치관
[정인준 칼럼] 의료개혁 갈등으로 본 한국인의 물질주의 가치관
  • 정인준
  • 승인 2024.03.18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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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 지난 2월 19일 100개 수련병원에 근무하던 1만1000여명의 전공의들이 정부의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등 일방적인 의료개혁에 반대한다며 계약 포기 또는 근무지를 이탈한데 이어, 전국 20개 의과대학 비상대책위원회는 3월15일 회의에서 서울대 등 16개 대학 의대 교수들이 면허정지를 앞둔 전공의 보호를 위해 정부의 전향적 변화를 촉구하면서 3월25일 이후 집단 사직서를 제출하기로 의결했다고 한다.

교육개혁, 노동개혁 및 연금개혁 등 3대 개혁 과제의 혁신이 부진한 가운데 2000명 정원 증원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윤석열 정부가 의대 교수 및 수련병원 전공의들의 의료개혁 반대 집단 행위에 대응해 돌파구를 찾지 못하면서 국민들 사이에 의료 및 건강보험 서비스 시스템에 대한 불안감이 높아지고 있다.

학원가에 초등학생 의대반이 생긴 지 오래된 것을 보면 교육개혁과 의료개혁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어 해결방안 강구에 창의적인 발상이 요구된다.

2021년 선진국 그룹에 진입한 한국 국민들이 경제적 풍요 속에서 예전 보다 더 우울하고 불행하다고 느끼며, 기록적인 저출산(2023년 합계출산율 0.72명)으로 국가 소멸 위기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 정치학자 로널드 잉글하트는 ‘조용한 혁명(The Silent Revolution)’에서 ‘세계가치관 조사(World Value Survey)’ 분석을 통해 1970년대 이후 스웨덴,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 소득수준과 교육수준이 높아지면서 국민들의 물질주의 성향은 약해지고 탈물질주의 가치관으로 전환하는데 이러한 가치 전환이 정치에서 새로운 사회운동의 동력이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잉글하트의 연구에서 물질주의 가치관은 ‘경제성장, 권위주의적 정부, 애국심, 크고 강한 군대, 법과 질서’를 중시하고, 탈물질주의 가치관은 ‘개인의 발전과 자유, 정책결정에 대한 시민참여, 안전과 환경’을 중시한다.

2008년 이후 부유한 선진국에서는 탈물질주의자 비율이 45-48% 수준으로 증가하는 것이 일반적인 패턴인데 잉글하트는 매우 예외적인 사례로 한국을 지목하였다. 한국은 경제적으로 선진국이 되었음에도 탈물질주의자 비율은 14-15% 수준으로 흔히 개발도상국에서 보이는 물질주의 가치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소득이 높은 사람일수록 더 물질주의 가치관을 갖고 있으며 이들은 ‘의대열풍’에서 보듯이 자식을 법조인, 의사로 키우기 위한 교육 경쟁에 앞서는 등 부유한 ‘개인’이나 물질주의 대물림에 관심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선진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안전하고 풍요로운 ’따듯한 공동체 사회‘를 만드는데 일에는 거의 관심이 없는 듯 보이고, 물질만능주의 사회분위기속에서 ‘명품’ 소비를 늘리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러한 한국사회의 지독한 물질주의 가치관은 인문학의 위기, 지식층의 철학의 빈곤을 가져오고 있다. 현재 탈물질주의 가치관 수준이 높은 유럽에서는 역사학, 고고학 등 인문학에 대한 평가도 높다. 삼성의 이병철 선대 회장도 손자들에게 대학에서 인문학- 동양사(이재용), 서양사(정용진)를 전공하도록 권유한 바 있다.

서울대 김세직 교수는 저출산의 원인은 0% 대로 추락하는 경제성장률이라며, 이로 인해 미래에 소득증가를 기대하기 어려운 젊은이들이 결혼과 출산을 포기한다고 진단했다.

저성장의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제조업 뿐 아니라 타다와 같은 택시 서비스나 비대면 진료 금지 등 OECD 국가 중 가장 규제가 심한 국가의 하나인 한국에서 글로벌 수준의 규제 혁신도 필요하다.

이원복 교수는 서유럽 국가에서 르네상스와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발달한 개인주의가 자유민주주의 탄생의 토대가 되었다고 말한다. 한국은 이 두 가지를 겪지 않았고, 산업화에 이어 민주화를 성취했다고 하나 아직도 국민의식은 경제성장, 권위주의적 정부, 법과 질서가 중시되는 물질주의 가치관을 가진 개발도상국에 머물러 있다.

미술평론가 최광진 박사는 ‘미학적 인간으로 살아가기’에서 인간은 지성(과학), 의지(종교), 감성(예술)이라는 세 가지 삶의 영역을 동시에 살아가는 존재라며, 물질만능주의로 돈 버는 것이 인생의 목적, 수단이 되는 현실은 이념, 종교, 학교도 치유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유일한 해법으로 물질주의 관습에서 벗어나 스스로 창조하는 삶을 살아가는 ‘미학적 인간’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유튜브 ‘미학방송’을 운영하고 있는 최박사는 제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물질문명에서 정신문명으로 바뀌는 문화의 시대가 열린다며 “공무원, 의사, 건물주 보다는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 직업이 좋은 직업이다”고 말한다. 한국 전통문화를 소재로 한 한류(드라마, K-pop, 영화, 한식 등)는 창조성이 발휘되어 글로벌 문화상품이 된 사례이다.

1980년 대 이후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시대의 순풍을 타고 선진국으로 도약한 한국 사회가 지난 50년간 압축 성장 과정에서 발생한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해지면서 양극화가 심화되고, 극단적 이념 대립으로 공동체 의식과 사회적 연대감이 약화되었다. 케인즈도 70년 전 ‘국가적 자급자족’ 제하 강연에서 ‘세계화로 인해 돈이 삶보다 우위를 점한다’고 비판했다.

이제 국내 의료분야도 태국과 같이 외국인 대상 영리병원 설립 등 의료관광을 산업화하고, 아시아 국가들과의 의료 교류협력으로 K-의료를 세계화하는 대담한 전략을 구상한다면 현재의 의료개혁 갈등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방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사회에 탈물질주의 가치관을 가진 고소득층이 증가하고, ‘따듯한 공동체 사회’에 대한 공감대를 만든다면 인공지능(AI) 등 첨단과학기술, 문화, 의료 등 제4차 산업혁명에 필요한 인재 육성도 보다 수월해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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