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방 관광, 인프라 개선 시급”… 9.6만 팔로워가 꼬집은 한국의 과제
- 알고리즘보다 소중한 ‘여행의 본질’, 다시 보부상 짐을 꾸리는 이유

[파이낸셜리뷰=조용식 기자]서울숲의 싱그러운 새소리가 창가로 스며드는 오후, 성수동의 한 스튜디오에서 9.6만 명의 팔로워와 소통하는 여행 크리에이터 '트래블 앨리스(Travel Alice)' 김희경 씨를 만났다. 그녀는 인터뷰 하루 뒤 홍콩 출장을 앞두고 짐을 꾸리는 와중에도, 지난 11년간 길 위에서 쌓아온 자신의 서사를 차분하면서도 밀도 있게 풀어놓았다.
"제 인스타그램에는 10년 넘게 바뀌지 않는 문장이 하나 있어요. '인생 짧아요. 부지런히 행복해야 돼요'라고 적어 두었죠. 현재를 사랑하고 여행을 계속 즐기면서 콘텐츠를 만드는 앨리스입니다.“
연극 무대에서 여행의 지평으로, 앨리스라는 이름의 기원
김희경 씨의 독특한 이력 중 하나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대학교까지 이어진 연기 전공이다. 영화과 재학 시절, 선배의 졸업 작품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주인공 역을 맡았던 인연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녀를 상징하는 이름이 되었다.


외국인 친구들이 발음하기 어려워하던 본명 '희경' 대신 선택한 '앨리스'는 그녀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옷과 같았다. 하지만 화려한 배우의 길은 생각보다 높고 견고했다. 연예인의 길은 선택받은 소수만의 영역임을 빠르게 체감한 그녀는 이후 커피 강사 등 다양한 직업을 거치며 삶의 방향을 모색했다. 일상에 지쳐 도피하듯 떠난 여행은 역설적으로 그녀에게 새로운 인생의 무대를 열어주었다.
본격적인 활동은 2015년 필리핀에서 7개월간 머물며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인플루언서'나 '크리에이터'라는 개념조차 희박하던 시절이었다. 단순히 여행지가 좋아서 올린 기록들이 당시 '여행에 미치다' 대표와의 인연으로 이어졌고, 그녀는 그곳에서 7년간 근무하며 콘텐츠 제작 역량은 물론 광고주 커뮤니케이션, 팸투어 운영 등 업계 전반의 흐름을 익혔다.
"여미(여행에 미치다)에서의 7년은 제게 엄청난 자산이에요. 혼자였다면 몰랐을 사회생활과 이 시장이 돌아가는 구조를 배웠죠. 덕분에 지금 프리랜서로 활동하면서도 많은 광고주와 막힘없이 소통할 수 있는 스킬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고독한 취재길을 버티게 하는 '동료애'와 팸투어의 진화
대중에게 비치는 크리에이터의 삶은 고급 호텔과 근사한 식사로 가득한 동경의 대상이지만, 김 씨가 전하는 현장의 실상은 사뭇 다르다. 그녀는 스스로를 '보부상'이라 칭한다. 3박 4일 일정의 출장에도 하루 세 벌 이상의 착장을 준비해 총 15벌 남짓한 옷을 챙긴다.


"장소의 온도, 빛의 각도에 따라 가장 잘 어우러지는 아웃핏을 연출해야 하니까요. 현장에 도착해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촬영 일정을 소화하고 숙소로 돌아오면, 그때부터 수백 기가의 데이터 백업과 편집 작업이 시작됩니다. 출장 중에는 평균 수면 시간이 3시간에 불과할 정도로 업무 강도가 높아요. 화면에 직접 나와야 하니 외적인 준비 시간도 상당하죠. 화려함 뒤에는 쉴 틈 없는 '기록 노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런 고된 일정을 버티게 하는 원동력 중 하나는 동료애다. 앨리스는 팸투어(Familiarization Tour)를 통해 만나는 동료들과의 관계를 단순한 비즈니스 파트너 이상으로 정의한다. 과거 '여행에 미치다' 인스타그램 계정을 7년간 운영하며 실력 있는 크리에이터들을 발굴하고 모았던 경험은 그녀에게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팸투어는 단순히 여행지를 구경하는 자리가 아니에요. 같은 분야에서 같은 고민을 하는 분들을 만나 그들만의 노하우를 듣고, 때로는 슬럼프를 함께 나누며 위안을 얻는 공간이죠. 저는 여미 시절부터 좋은 콘텐츠를 만드는 분들에게 먼저 연락하고 자리를 만드는 일들을 해왔어요. 그렇게 쌓인 커넥션들이 이제는 함께 새로운 일을 도모하는 든든한 동료 의식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녀는 이제 관광청이나 호텔로부터 '콘텐츠가 잘 나올 수 있는 크리에이터 팀'을 구성해달라는 의뢰를 받을 만큼, 업계에서 신뢰받는 커뮤니티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단순히 나열된 인플루언서가 아니라, 현장을 즐길 줄 아는 동료들과 팀을 꾸려 시너지를 내는 것. 그것이 앨리스가 추구하는 진화된 팸투어의 모습이다.
크리에이터를 넘어 기획자로, '오키보루' 마케팅의 성공 서사
최근 앨리스는 개인 크리에이터를 넘어 브랜드 기획자로서의 역량도 증명해내고 있다. 여의도에 오픈한 국내 1호점 '오키보루(OKIBORU)'의 마케팅 협업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녀는 이 프로젝트에서 단순히 사진 몇 장을 올리는 홍보에 그치지 않고, 브랜드의 철학을 대중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판을 짰다.


"요즘은 크리에이터로서의 파이보다 마케팅 기획 쪽의 파이를 키워나가고 있어요. 주변에 콘텐츠를 너무나 잘 만드는 친구들이 많거든요. 저는 그들이 가진 창의적인 역량을 브랜드와 연결하는 길잡이가 되고 싶어요. 오키보루 프로젝트 역시 동료들과의 끈끈한 유대를 바탕으로, 브랜드가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도록 기획 단계부터 세밀하게 참여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선발 주자로서 겪었던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실력 있는 후배 크리에이터들이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으며 활동할 수 있는 커뮤니티를 꿈꾼다. 브랜드에게는 최상의 결과물을, 동료들에게는 성장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 11년 차 베테랑 앨리스가 그리는 새로운 목적지는 바로 이 지점이다.
"풍광은 훌륭하나 인프라는 가혹하다"
11년 차 베테랑의 시선은 날카로웠다. 그녀는 최근 정부가 추진하는 외국인 관광객 유치와 지방 여행 활성화의 핵심이 단순한 홍보를 넘어선 '정보의 접근성'에 있다고 짚었다.

"일본 소도시 여행을 다니며 가장 부러웠던 건, 아주 작은 마을조차 여행자가 혼자서도 충분히 움직일 수 있도록 설계된 인프라였어요. 우리나라는 지방 도시마다 너무나 예쁘고 훌륭한 곳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매력을 뒷받침할 시스템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가장 큰 장벽은 단연 '교통'이에요. 차가 없으면 접근조차 힘든 명소가 너무 많고, 대중교통 연계 시스템도 미비하죠."
한국은 세계적인 관광지임에도 불구하고, 구글 맵 활용이 제한적이라는 점이 외국인들에게는 거대한 장벽으로 다가온다. 여기에 뚜벅이 여행자를 위한 대중교통 연계 시스템이나 외국인 친화적인 숙박 시설이 갖춰지지 않은 곳이 태반이라는 사실은 지방 소도시 관광의 난이도를 높이는 결정적 요인이다.
운전을 하지 못하는 여행객이나 나홀로 여행을 즐기는 외국인들이 한국 소도시의 매력을 온전히 누리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이러한 소프트웨어적 결핍과 인프라의 부재를 해결하지 않는 한, 지방 관광 활성화는 실현 불가능한 공허한 구호에 그칠 수 있다는 것이 그녀의 뼈아픈 조언이다.
숫자를 넘어 진심으로, 다시 '나를 위한 여행'의 시작
앨리스는 인플루언서의 호흡을 보통 '4년'이라 말한다. 2015년 시작해 쉼 없이 달려온 2019년, "더는 비행기를 타고 싶지 않다"고 느낄 만큼 지독한 번아웃이 찾아왔던 탓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팬데믹이라는 거대한 정지 화면 속에서 그녀는 길 위를 누비던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 길어 올렸다.


이제 그녀는 숫자의 폭발적인 성장보다는 콘텐츠의 진정성에 무게를 둔다. 자극적인 유행보다는 자신만의 확고한 톤앤매너를 지키는 것, 그리하여 누군가의 마음속에 여행이라는 작은 불꽃을 지피는 것이 앨리스가 추구하는 기록의 최종 목적지다.
"앞만 보고 달리다 보면 여행 자체가 싫어지는 순간이 반드시 와요. 이 일을 오래 지속하려면 여행을 사랑하는 마음이 변치 않도록, 때로는 나만을 위한 여행과 취미를 병행해야 하죠. 일 속에서도 내가 이 여행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 조언은 후배 크리에이터들을 향한 진심 어린 당부이자, 11년 차인 자신을 다독이는 다짐이기도 하다. 그런 앨리스가 다시 '보부상'의 짐을 꾸린다. 이번 여정은 조금 더 특별하다. 홍콩을 수차례 방문하면서도 바쁜 일정 탓에 늘 미뤄두었던 ‘드래곤스 백(Dragon’s Back)’ 트레킹 코스를 이번에는 10일간의 여유로운 일정으로 오롯이 만끽할 계획이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 세상을 재단하던 크리에이터의 옷을 잠시 벗어두고, 이름 모를 골목의 공기와 소리에 집중하며 '부지런히 행복해질' 준비를 마친 그녀. 인터뷰를 마친 앨리스의 뒷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가볍고 선명했다.
"인사이트 수치보다 중요한 건, 누군가 제 기록을 보고 여행을 꿈꾸게 되는 거예요. 인생은 짧잖아요. 우리는 지금 이 순간, 부지런히 행복해질 권리가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