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흙 테라로사가 빚은 마법… 932종 야생생물 뛰노는 생태계
눈으로 본 카르스트 지형, 두 손으로 확인하는 투수 실험까지

[파이낸셜리뷰=조용식 기자] 전동차가 문경 돌리네습지 탐방지원센터를 벗어나 굽이진 산길로 접어든다. 창밖의 건물이 사라지자 곧 숲이다. 산길을 따라 고도를 높여도 물이 있을 만한 풍경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전동차에서 내려 전망대에 올라서자 모습이 달라진다. 산으로 둘러싸인 낮은 지대에 물과 초지가 펼쳐지고, 버드나무 사이로 목재 탐방로가 길게 이어진다. 산속에 물이 고인 것도 낯설지만, 물과 초지, 숲이 한 공간에 이어지는 모습도 일반적인 산지 풍경과는 다르다.
경북 문경시 산북면 우곡리 굴봉산 정상부에 자리한 문경 돌리네습지다.
물이 빠져야 할 석회암 산, '붉은 흙'이 기적을 빚다
습지보호지역 면적은 49만4434㎡다. 2017년 6월 국가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됐고, 2024년 2월 2일 우리나라 25번째이자 경북 최초의 람사르습지로 등록됐다. 문경시는 2025년 7월 람사르습지도시 인증도 받았다.



전망대에서 습지를 내려다보던 문창영 자연환경해설사가 이곳이 특별한 이유를 설명한다.
“제천이나 단양, 삼척 같은 석회암 지대에서도 돌리네 지형은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돌리네에 이렇게 물이 고여 습지가 형성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돌리네(Doline)’는 석회암의 주성분인 탄산칼슘이 빗물이나 지하수에 녹으면서 지표가 접시처럼 움푹 들어가 형성된 카르스트 지형을 말한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석회암 지대는 물이 지하로 잘 빠지는 특성을 갖는다. 돌리네 역시 물이 고이기보다 지하로 빠져나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문경에서는 움푹 들어간 지형에 물이 남았고, 그 자리에 습지가 만들어졌다.
문 해설사는 그 이유로 테라로사(Terra Rossa)를 꼽았다.
“석회암이 녹는다고 모든 성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녹지 않고 남은 성분들이 붉은 점토질 토양을 만듭니다. 입자가 곱고 찰기가 있는 테라로사가 바닥에 쌓이면서 물이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게 된 겁니다.”

테라로사는 석회암이 풍화되는 과정에서 탄산칼슘이 녹아나간 뒤 규산과 철 등의 불순물이 남아 형성된 점토질 토양이다. 문경 돌리네에서는 이 토양이 바닥에 쌓여 불투수층을 형성하면서 물이 머물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다.
흥미로운 점은 우리에게 유명 커피 전문점 이름으로 더 친숙한 이 '테라로사'가 실제로 세계적인 커피를 키워내는 생명의 흙이라는 사실이다. 철분과 미네랄이 풍부하고 수분 유지력이 뛰어나 세계 최대 커피 산지인 브라질 등지에서는 커피 재배에 최적화된 토양으로 꼽힌다. 지구 반대편에서 향긋한 커피를 빚어내는 이 비옥한 붉은 흙은, 과거 문경의 척박한 산꼭대기에서 사과와 오미자 농사를 가능케 했고, 지금은 희귀한 산지 습지를 만들어 932종의 동식물을 품어내는 기적을 연출하고 있다.
이 같은 형태의 습지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환경부가 2024년 람사르습지 등록 당시 밝힌 자료에 따르면 당시 전 세계 람사르습지 가운데 돌리네 또는 여러 돌리네가 연결된 우발라 지형에 발달한 습지는 문경을 포함해 6곳뿐이었다.
932종이라는 숫자가 풍경으로 바뀐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목재 탐방로로 들어가면 조금 전 한 덩어리처럼 보였던 풍경이 하나씩 나뉘기 시작한다.




물가에는 습지식물이 자라고 그 뒤로 초지가 이어진다. 조금 더 걸으면 숲이다. 길가에서는 암반이 그대로 드러난 곳도 만난다. ‘석회암과 물의 만남, 카르스트’라고 적힌 안내판 앞에서 걸음을 멈추면 빗물과 지하수가 오랜 시간 석회암을 녹여 만든 굴곡과 틈을 가까이에서 살펴볼 수 있다. 멀리서 보던 습지가 어떤 땅 위에 만들어졌는지를 확인하는 구간이다.
지질을 따라가던 탐방은 자연스럽게 생태 이야기로 이어진다.




문경시가 확인한 문경 돌리네습지의 야생생물은 동물 465종과 식물 467종 등 모두 932종이다. 수달·담비·삵·하늘다람쥐·팔색조·붉은배새매·구렁이·물방개 등 멸종위기 야생동물이 확인됐고, 꼬리진달래·낙지다리·들통발·쥐방울덩굴 등 희귀식물도 자란다.
탐방로 한편에는 ‘구렁이 발견 장소’라는 표지가 붙어 있다.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 야생생물 Ⅱ급인 구렁이가 실제 발견된 지점을 표시해 놓은 것이다. 조금 전까지 석회암과 물의 관계를 살펴보던 탐방길은 이곳부터 습지에 기대어 살아가는 생명으로 이어진다.
문 해설사의 시선은 이번에는 물속으로 향했다.
“들통발이라는 식물이 있습니다. 물속의 작은 생물을 잡아먹는 우리나라 자생 수생 식충식물입니다. 이곳은 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습지와 초원, 숲이 함께 있기 때문에 다양한 생물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탐방로를 더 따라가면 낙지다리 군락지와 연리목으로 향하는 이정표가 나타난다. 물가와 초지, 숲이 짧은 거리를 두고 이어지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지질과 식생, 야생동물의 흔적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932종이라는 숫자로 설명됐던 생물다양성이 탐방로를 걸으면서 하나씩 눈앞의 풍경으로 바뀐다.


다만 지금 눈앞에 펼쳐진 습지의 모든 풍경이 사람의 손길 없이 그대로 남아온 것은 아니다. 일부 지역은 과거 논과 밭, 과수원 등 경작지로 이용됐고, 그 과정에서 지형과 식생이 영향을 받았다. 2017년 습지보호지역 지정 이후에는 훼손지를 중심으로 지형과 식생을 복원하고 생태계를 보전하는 작업이 이어졌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돌리네와 그 안에 자리 잡은 생태계, 사람이 이용했던 흔적과 다시 습지를 보전하는 과정이 한 공간에 함께 남아 있는 셈이다.
수만 년 지질의 신비, 단 몇 분의 실험으로 마주하다
야외 탐방에 이어 탐방지원센터에서는 돌리네습지가 형성된 원리를 직접 살펴보는 체험이 진행됐다. 먼저 산속에서 여러 차례 설명을 들었던 테라로사의 특성을 확인하는 투수 실험이다.




투명한 두 개의 용기에 각각 성질이 다른 토양을 넣고 같은 양의 물을 붓는다. 한쪽에서는 물이 자갈과 흙 사이를 지나 빠르게 아래로 떨어져 받침 컵에 고인다. 테라로사가 담긴 용기는 확연히 다르다. 붉은 토양 위에 물이 머물면서 아래로 내려오는 속도가 훨씬 느리다.
현장에서 문창영 해설사가 설명했던 ‘물이 잘 빠지는 석회암 지대에 어떻게 습지가 형성됐을까’라는 의문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과정이다. 입자가 곱고 점성이 강한 테라로사가 물의 이동을 늦추는 모습을 직접 비교하면서 돌리네습지의 형성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원리에 대한 이해는 내 손안의 작은 생태계를 빚어보는 '테라리움' 체험으로 이어진다. 작은 유리병에 자갈과 흙을 차례로 넣고 이끼와 식물을 심는다. 투수 실험이 돌리네습지의 지질적 특성을 살펴보는 과정이라면, 테라리움은 흙과 수분, 식물을 직접 다뤄보는 생태체험이다.
야외에서 지형과 생태를 살펴보고 실내에서 지질 원리를 확인하는 방식은 돌리네습지를 단순히 둘러보는 데서 그치지 않게 한다. 특히 전동차를 이용해 습지 가까이까지 이동할 수 있어 긴 산행에 대한 부담도 크지 않다.
전동차를 타고 산을 오를 때는 숲 너머에 어떤 풍경이 있는지 알기 어렵다. 전망대에서는 물과 초지, 숲이 먼저 보이고, 탐방로를 따라가면 석회암과 테라로사, 습지식물과 야생동물의 흔적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낸다. 탐방지원센터에서 투수 실험까지 해보면 산에서 들었던 설명도 한결 쉽게 이해된다.
물이 잘 빠지는 석회암 산에 만들어진 습지. 문경 돌리네습지 여행은 낯선 풍경을 보는 데서 시작해, 그곳에 왜 물이 머물게 됐는지를 알아가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INFO | 문경 돌리네습지


위치 : 경북 문경시 산북면 우곡리 666 일원
특징 : 석회암 돌리네 지형에 형성된 국내 유일 산지 습지·세계 람사르습지
이용요금 : 습지 입장 및 주차 무료 (전동차 탑승 시 유료: 왕복 성인 1,800원 / 청소년·군인 1,400원 / 어린이 800원)
개방시간 : 3~10월 09:00~18:00 (입장 마감 17:30) / 11~2월 09:00~17:00 (입장 마감 16:30)
전동차 운행 : 탐방지원센터~습지 진입부 운행. 3~10월 09:30~17:30 / 11~2월 09:30~16:30
유의사항 : 우천·강설·기상 악화 및 안전상 위험이 있을 경우 전동차 운행 제한 가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