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혁의 시사 인문학 365일] 5월 27일 존재론
[김진혁의 시사 인문학 365일] 5월 27일 존재론
  • 파이낸셜리뷰
  • 승인 2019.05.27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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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글을 씀으로써 존재했고, 내가 존재한 것은 오직 쓰기 위해서였다. '나'라는 말은 '글을 쓰는 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는 기쁨을 알았다.

-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

[파이낸셜리뷰] “인생은 B(birth)와 D(death)의 C(choice)”라는 말로 유명한 사르트르는 무신론적 실존주의를 전개하면서 인간은 타인의 시선에서 삶의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

사르트르는 실존주의적 휴머니즘에서 인간은 스스로 자유롭게 운명을 선택하고 개척해가는 존재라고 규정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말로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한다. 사물은 어떤 목적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다. 본질에 해당되는 목적이 존재에 앞선다. 하지만 인간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날 때 목적이 정해지지 않았다. 세상에 던져지고 난 후에야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찾는 것이 인생이다.

인간은 목적을 염두에 두고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삶의 목적을 주체적으로 선택하도록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의 참모습은 이미 만들어진 목적에 따른 삶을 살기보다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해서 개척해 나가는 주체적 실천적 존재라는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작가. 무신론적 실존주의를 제창했다. 노벨상이 서구 작가들에게 편향되어 있다고 비판하며 1964년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절했다. 2세 때 아버지를 여의지만, '이 세상에 좋은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오히려 축복으로 여겼다.

이미 9세 때 문학 서적 500여 권을 구입하여 읽기 시작했다. 파리 사범대학을 나와 교사 생활을 하는 동안 평생의 동반자 보부아르를 만났다. 제2차 세계대전 때 군복무를 하면서 소설을 썼고,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난 후부터 레지스탕스 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실존주의 문학가 카뮈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프랑스 대통령 드골은 ‘사르트르 자신이 프랑스다’라고 말한 바 있다.

사르트르는 드골 정권이 들어선 이후 그 독재적 성격에 반대하며 반정부 입장을 고수했다. 그리하여 1958년 프랑스 보호령인 알제리에서 독립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는 알제리를 지지하는 투쟁에 가담했다. 그런데 가담한 모든 사람이 체포되었으나 그만은 제외되었다. 어떤 장관이 드골 대통령에게 그 이유를 묻자, 대통령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사르트르 자신이 프랑스이기 때문이지.”

사르트르는 작은 키에 사팔뜨기이긴 했으나 익살 등으로 사람들을 곧잘 웃겼다.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그 의도를 잘 파악했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었다.

또 자기가 옳다는 확신을 가지고 싸울 때는 자신의 모든 것, 곧 생명까지도 걸고 투쟁했다. 그는 전통적인 결혼제도를 반대하여 계약결혼을 했으며, 두 사람만의 자유를 위해 자녀를 갖지 않았다. 사유재산제도를 반대하여 호텔에서 잠을 자고, 카페에서 일했으며,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다.’는 신조 때문에 그는 1946년에 집을 사서 1962년까지 사는 동안 커다란 심리적 고통을 느꼈다고 한다.

오른쪽 눈의 시력은 이미 3세 때 상실했으나 1975년에 왼쪽 눈마저 시력이 떨어져 독서는 물론 집필도 못하게 되었다. 1980년 4월 15일, 5년 전부터 앓아온 폐기종으로 사망했을 때, 그의 나이는 75세였다.

오늘의 역사: 자와할랄 네루(Pandit Jawaharlal Nehru, 1889~1964) 타계

인도의 초대 총리, 비동맹주의의 선도자, 독립 운동가. 네루는 인도 우타르프라데시 주 알라하바드에서 태어났다. 부친 모틸랄 네루는 식민통치 하의 인도에서 변호사로 활동해 부와 명성을 쌓았고, 정당으로 발전하여 독립운동에서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다. 자와할랄은 9회 약 10년 간 투옥되었으며 수감 기간 동안에 네루는 아직 어린 딸 인디라를 위해 편지 형식으로 쓴 ‘세계사 편력’(1934) 등의 저서를 집필했다. 네루는 독립 이후 17년 동안 총리직을 담당하다가 1964년 5월 27일에 7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서구적인 환경에서 자란 자와할랄은 16세 때인 1905년에 영국으로 유학해 해로 스쿨에 입학한다. 영국의 명문 기숙학교인 해로 스쿨은 윈스턴 처칠의 모교이기도 하다.

마하트마 간디와는 달리 적극적인 파업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며, 인도 독립 후 초대 총리로서, 민주주의 정치와 사회주의 경제 체제를 결합한, 소위 ‘네루식 사회주의’를 주창하였고 비동맹 외교노선을 펴, 제3세계 지도자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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