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증권업계 최연소 지점장,
투자자문사에서 아시아를 선도하는 금융회사로
바람이 불지 않으면 바람개비를 돌려라

[파이낸셜리뷰] 맨손으로 시작해 국내 1위 증권사를 일군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은 인도 현지 증권사 쉐어칸증권(Sharekhan Limited)을 300억루피(약 4737억)에 인수 했다. 박현주 회장은 저축에서 투자로 우리나라 금융의 흐름을 바꾼 인물로 기억된다. “자본시장의 발전 없이 자본주의는 발전할 수 없다”는 말을 명심했다.
박 회장은 고려대 경영학과 2학년 때. 돈 관리하는 법을 배우라는 뜻으로 어머니가 보낸 1년 학비와 생활비를 몽땅 부쳐줘 주식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26세에 증권투자로 번 돈으로 조그만 사설 투자자문회사를 설립했다.
직원도 한 명 두었다. 당시 증권시장은 소문에 의존하는 엉성한 시스템으로 운영됐다. 박 회장은 시장 분석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2년 뒤인 1986년, 박 회장은 투자자문회사를 문닫고 증권회사 입사를 결심했다.
투자자문회사 설립에 법적 근거가 없는 점과 아직 개인사업자가 독자적 브랜드로 자본시장에 뛰어들 분위기가 아니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는 증권가 최고스타였던 이승배 동원증권 상무 밑에서 배우고 싶었다. 그는 여러 차례 문전박대를 이겨내고 입사에 성공했다. 그로부터 불과 45일 뒤 대리로 승진하는 특유의 실력을 발휘했다. 코스피지수가 처음으로 1000선을 돌파한 뒤 곧바로 폭락세로 돌아서 모든 사람들이 지점 근무를 기피하던 1989년 박 회장은 지점장을 자원했다.
박현주 회장은 노무라증권의 ‘퀵 영(Quick Young) 전략’을 벤치마킹해 패기만만한 젊은이들로 영업진용을 새로 짰다.
그의 전략이 맞아떨어져 동원증권 중앙지점은 1993년 1조 4000억 원의 주식 약정(매매체결액)을 올리며 전국 1위 지점으로 부상했다. 그 후 1997년 6월 박 회장은 당시 구재상 압구정지점장, 최현만 서초지점장 등 8명의 ‘박현주 사단’과 함께 잘 나가던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미래에셋캐피탈(옛 미래창업투자) 창업을 했다. “재벌 중심 경제체제에도 장점이 많지만 이제 다른 길을 찾아야 할 때라고 봤습니다.” 1998년 ‘박현주 1호 펀드’로 알려진 뮤추얼펀드를 출시하면서 수익률 90% 이상을 기록한 후 1999년 ‘바이코리아펀드’가 또 다시 시중에 엄청난 히트를 기록했다.
1998년 말엔 미래에셋자산운용을 설립한 뒤 국내 최초 뮤추얼펀드인 ‘박현주 1호’를 성공시켰고, 말 못할 고생 끝에 미래에셋은 한국의 대표 운용사로 성장했다.
또 ‘아시아를 선도하는 금융회사’라는 목표를 향해 누구도 가보지 않은 ‘해외시장 개척’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2000년대 초반 테크버블이 불자 ‘다음커뮤니케이션’이 가치에 비해 주가가 너무 낮다고 판단하고, ‘다음’ 주식에 24억을 투자했는데 ‘다음’ 주식에서만 1200억 원을 벌어들이면서 초대박이 났다.
2000년대 초반 그 유명한 ‘디스커버리’, ‘인디펜던스’ 펀드를 출시한다. 미래에셋증권과 미래에셋생명보험을 세우고 미래에셋생명보험을 증시에 상장했다.
대우증권 인수전에서 승부수를 던져 인수에 성공했다. 그밖에 미래에셋증권과 합병해 미래에셋대우증권을 출범한 뒤 해외사업 확대를 위해 전력 투구하고 있다
그는 한국 최고의 부자가 되기보다 최고의 기부자가 되겠다고 결심해서 2000년 창업 후 거둔 개인 수익의 대부분인 75억 원을 기부해 박현주재단을 설립했다.
방학 기간을 이용해 경제와 금융을 배우는 ‘어린이 경제캠프’를 운영하고 청소년들의 체험학습을 위해 중국 등지로 보내고 있다.
그가 지점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지점훈은 “바람이 불지 않을 때 바람개비를 돌리는 방법은 앞으로 달려가는 것이다”였으며 다른 회사로부터 고액 연봉과 승진을 제시하며 스카우트 제의를 여러 번 받았으나 오래도록 간직한 꿈과 신념이 있어 이를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그의 도전은 끝이 없다. 해외 부동산뿐 아니라 국내 사업 투자도 현재진행형이다. 미래에셋은 전라남도 여수에 1조 1000억 원 규모의 투자 결정으로 또 한 번 시장의 관심을 받았다. 외국인 투자자와의 컨소시엄 펀드를 조성해 향후 5년간 호텔·리조트 등 인프라 개발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